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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1
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1
  • 황규산 기자
  • 승인 2019.04.17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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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항일독립투사

비운의 항일독립투사

양화면과 임천면의 경계인 탑산리 입구 대로변 한 켠에 익숙치않은 용어, 순열사로 시작하는 ‘순열사삼봉허환선생추모비’(殉烈士三峰許煥先生追慕비)가 서있다. 1981년 부여군수와 지역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비를 살펴보면 주인공 허 환선생은 1901년 양화면 초왕리에서 출생하여 임천보통학교와 강경 양정학원에서 수학한 후 고향에 돌아와 금계친목회를 결성, 문맹퇴치와 구국정신을 함양하던 중 3,1만세운동이 발발하자 임천. 입포장시위를 주도한다. 이어 상해임정에 참여코저 인삼상허가를 받아 대만에 입국하며 애국단체인 조선인친우회 총무를 밭아 군자금모집책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잡히고 모진 고문 끝에 1934년10월 사망한다. 유해가 돌아올 때 소요를 우려한 일경이 긴장했다니 선생이야말로 ”순국선열+열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판결문이나 범죄인명부같은 행형(行刑)기록이나 신문보도 등 객관적인 소명자료가 부족하여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이 반려된 것이다. 그러나 군민들의 안타까움일까? 2014년 부여군에서는 허 환 선생을 ‘부여100년을 빛낸인물’에 선정한다. 중앙정부가 인정하지 못한 독립유공자를 부여군민의 이름으로 현창하는 특이한 사례다.

이번에는 여성쪽을 살펴보자.

1904년 석성면 석성리의 유복한 가정에서에서 출생한 고명자(高明子, 일명 고사찰)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후 대구신명여학교를 수료한 신여성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사회주의계열의 항일운동에 뛰어든 그녀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을 다녀와 조선노동당 조직재건에 온몸을 던지고 당대 최고의 여성운동가 허정숙, 주세죽과 함께 항일여전사 트로이카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러나 1931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일제말에는 잠시 친일논조의 글을 발표하는 등 한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해방 후엔 여운형을 도와 근로인민당을 창당하는 등 맹활약을 펼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50년2월 남노당 조직활동 혐의로 체포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는데 일설에는 한국전쟁초에 처형됐다한다.

허정숙은 월북하여 부총리에 올라 천수를 마친뒤 열사릉에 묻히고 박헌영의 아내였던 주세죽도 최근 독립유공자로 서훈됐지만 고명자는 말이없다.

고명자선생의 경우, 항일투쟁은 행형기록과 신문보도같은 객관적 자료로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일제말기의 친일행적과 석연치 않은 최후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이 조명되는 사례를 감안할 때 언제까지나 고명자선생을 ‘주홍글씨울타리’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과(過) 때문에 공(功)이 감추어 져서는 안될것이다.

최근 일제시대의 악랄한 행형기록의 하나인 ‘감시대상인물카드’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화제인데 그 명부중에 고명자(고사찰)가 있다. 비록 고문에 시달린 옥중모습이지만 당당한 기품에 고아한 미모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이 얼굴이 바로 ‘조선여성의 당당한 얼굴이요, 부여여인의 청초한 미소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행복이 보장된 이 아름다운 여성을 불행으로 내몰은것은 무었일까? 바로‘애국’이란 두글자이다.

허 환과 고명자, 그들이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면 “항일독립투사”로 부르면 된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들이 바로 달빛에 짙게 물든 ‘부여신화의 주인공’이다.

(부여역사문화연구회 이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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