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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⑧ 내산면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⑧ 내산면
  • 소종섭
  • 승인 2013.06.1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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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연재 순서
①외산면
②규암면
③초촌면
④장암면
⑤홍산면
⑥양화면
⑦구룡면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내산면은 부여에서 보령 쪽으로 가다 구룡면을 지나면 나온다. 지티고개를 넘어가면 외산면이다.

내산면은 서쪽으로는 해발 544m의 월명산을 경계로 보령군 미산면, 동쪽으로는 해발 455m의 축융봉을 경계로 은산면, 남쪽으로는 해발 329m의 천보산을 경계로 홍산면과 맞닿아 있다. 전체 면적의 74%가 임야인 전형적인 산간 마을로 인구는 2013년 5월 말 현재 1804명이다.

사과와 배는 각각 부여군 전체 생산량의 80%를 생산할 정도로 내산면의 특화 작물이다. 최근에는 밤을 재배하는 농가도 늘고 있다.

정부용 내산면장은 “과수 농가들이 많은, 향후 성장 동력이 강한 지역이다. 빚이 거의 없는 알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앞으로 점점 발전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내산면은 녹색농촌체험마을 조성 및 종합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2011년 녹색농촌체험마을에 구레울마을(천보 1,2리)과 녹간마을(주암 2리)이 선정되면서 각각 3억원의 사업비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주민들이 영농법인을 만들었고, 올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체험객들을 유치할 계획이다. 천보리에는 최근 국내 최초로 친환경, 무항생제로 장어를 양식하는 천보생물환경연구소가 들어서 주목받았다.

월명산 권역 단위 종합정비사업은 지티 1,2리와 금지 1,2리가 해당되는데 38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올해까지 세부 실시 설계 및 계약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귀농·귀촌 인구도 늘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 벌써 10여 가구가 귀농했다. 특히 주암리는 명지대학교 교수, 오산대학교 총장을 지낸 홍문표 박사, 전통문화대학교 임대성 교수, 한익수 공학박사 등이 터를 잡으면서 화제 마을이 되었다.

천연기념물인 주암리 은행나무. 해마다 정월이면 마을 주민들은 행단제를 지낸다. 21c부여신문

주암리는 마을 동쪽에 있는 양수암 앞쪽의 산 끝에 바위가 구슬처럼 박혀 있는 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형국이라는 녹간마을에는 둘레가 9m, 높이가 30m에 달하는 천연기념물 제320호로 지정된 유명한 은행나무가 있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영목(靈木)으로 모시는데 전염병이나 각종 질병이 횡행할 때도 이 마을이 안전했던 것은 모두 이 나무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해마다 음력 1월 2일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행단제를 지내고 있다.

이 나무는 나이가 몇 살인지, 누가 심은 것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성왕 때 맹씨 성을 가진 좌평 벼슬을 지내던 분이 심었다고 한다.

녹간마을 뒤에 맹정승의 집터로 알려진 곳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은산 각대리에 있던 숭각사 주지가 암자를 중수할 때 대들보로 쓰기 위해 은행나무의 큰 가지 하나를 베어가다 급사했고 사찰도 폐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미리 조짐을 알렸다고 한다. 8·15 해방 며칠 전에 동쪽 큰 가지가 부러졌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쪽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할 때에도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쌀바위가 있고 와불로 유명한 내산 미암사. 21c부여신문

주암마을 맞은편에는 30m 높이의 쌀모양 바위인 쌀바위가 있다. 촛대바위, 부처바위라고도 부른다. 주변에 미암사가 있는데 쌀바위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쌀바위에는 이런 전설이 전한다. ‘옛날 손자를 얻기 원하는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날마다 미암사에 찾아가 열심히 불공을 드렸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집에 쌀이 떨어진 사실도 모를 정도였다. 어느 날 비몽사몽 간에 관세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 바위에 심으면 하루 세 끼 먹을 쌀이 나올 것이니, 매 끼니를 지을 때 이 쌀을 가져다 짓도록 하라’고 했다. 꿈에서 깨 그렇게 하니 과연 쌀이 나왔다. 얼마 뒤에는 바라던 손자도 얻었다. 그러자 욕심이 생긴 노파는 쌀을 더 많이 얻고 싶어서 부지깽이로 구멍을 후벼팠다. 그러자 쌀이 더 많이 나오기는커녕 구멍에서 핏물이 나왔다. 그 뒤에는 바위에서 쌀이 나오지 않았다.’

쌀바위 옆에는 대한불교 대각종 총본산인 미암사가 있다. 미암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현재의 사찰 형태는 2005년에 와불과 산신각 등을 조성하면서 형성되었다.

내산면 소재지인 운치리 서운마을 뒷산에는 궁검대가 있다. 광산 김씨 20대손인 오옹 김효종 선생과 관련 있는 유적이다. 3.5m의 바위에 해서체로 궁검대(弓劒臺)라고 새겨져 있다.

ㄴ 21c부여신문

내산면 운치리 서운마을 뒷산에는 임금의 죽음이라 장례를 뜻하는 ‘궁검’대가 있다. 21c부여신문

‘궁검’은 임금의 죽음이라 장례를 뜻하는 말이다. 그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사복시정(정3품) 벼슬을 버리고 서운산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은거하며 매일 궁검대에 올라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홍산 청일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김효종 선생의 후손들인 광산 김씨 오옹공파는 내산, 외산, 구룡, 홍산 등에 큰 세를 형성하고 있다.

금지리 월명산에는 오랜 고찰인 금지사가 있다. 절 터 안에 선녀가 목욕을 하였다는 연못이 있었다는 데에서 마을 이름과 절 이름이 유래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금지사는 예전에는 고시 공부를 하는 이들이 많이 찾던 절이다. 깊숙한 산 속에 있어 과거에는 찾아가기가 만만치 않았으나 지금은 지티고개에서 금지사로 가는 도로가 개설되어 한결 편해졌다.

풍광이 수려하고 기운이 형형해 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금지마을은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들이 1806년 공주, 서천 등에서 도앙골로 이주해 살다가 1866년 대원군 시절 병인박해 때 다섯 명이 끌려가 순교했다. 2002년도에 이들을 위한 추모비를 이곳에 세웠다.

삼학사 중 한 명인 윤집의 묘소. 21c부여신문

온해 2리에는 삼학사 중 한 명인 윤집의 묘소가 있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침입한 청나라에 맞서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 윤집, 홍익한, 오달제를 일컫는다.

윤집은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로 끌려가 갖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심양 서문 밖에서 사형 당했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지은 뒤부터 역사에서 이들을 삼학사라고 불렀다. 구룡면 금사리에 윤집을 비롯한 이들 삼학사를 기리는 창렬사가 있다.

내산 지티리는 한말 의병활동과도 관련 깊은 곳이다. 충청도 지역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의 대표적인 인물이 민종식이다. 1906년 1월 민종식을 비롯한 여러 충의지사들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공격했다.

그해 3월에 민종식의 처남으로 부여군 구룡면 죽절리에 살던 이용규는 흩어졌던 동지들을 전주에서 모아 서천으로 왔는데 그 수가 300명에 달했다. 이에 맞춰 민종식은 1906년 4월 내산면 지티리에서 두 번째로 의병을 봉기했다.

민종식 의병은 홍산을 점령하고 서천, 남포, 보령 등 각 읍을 거쳐 홍주성으로 진격했는데 이때 의병의 숫자가 1100명에 달했다.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기획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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