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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국적인 서예가 무림(霧林) 김영기"
"가장 한국적인 서예가 무림(霧林) 김영기"
  • 21c부여신문
  • 승인 2011.12.2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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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부여人 - ⑦ (사)한국서도협회 무림 김영기 회장
-연재를 시작하며-
21세기 부여신문은 제5대 황규산 대표이사 취임을 하면서 제2의 창간 선언과 동시에 부여출신 향우(명사)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하기로 했다. 인물선정이나 시간제약·취재일정으로 무순으로 기재하오니 많은 이해를 부탁드린다.

우리고장 부여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인물들이 많다. 그중 문화·예술 분야인 서예 부문에서는 한국서도협회장을 맡고 있는 부여읍 출신인 무림 김영기 향우가 단연 돋보이고 있다. 김영기 회장은 부여 출신인 故 원곡 김기승 선생의 제자로 국전에서 연거푸 8회 입선하고 연 2회 특선 하면서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한국서단의 거목이다. -편집자 주-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국서도협회에서 무림 김영기 회장의 모습. 21c부여신문

16회 국전 입선 이후 연속 8회 입선, 2회 특선 및 최연소 기록
윤봉길 의사 사적비문, 백담사 금강문, 故 김대중 대통령 추모비문 등 작품


한자문화권인 중국을 비롯해 일본 등과 당당히 겨뤄 우리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면서 아시아에 녹아든 한국의 글씨로 우리 글씨의 귀중함을 알리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서도협회 무림 김영기 회장.

무림의 50여년 넘는 서예 인생은 고향인 부여에서부터 시작됐다. 어릴 적 아버님께서 신학문 대신 한문공부를 시켜 서당을 다니면서 자연스레 붓을 지니고 다니게 됐다. 서울로 상경해 신학문을 배우고자 했지만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글씨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에 유일했던 서예학원을 다니게되면서 서예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 회장은 16회 국전(1967년) 때 학원에서 28명이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중 혼자 입선을 하게 된다. 이후 학원에서는 김 회장에게 제대로 된 서예지도를 권유하면서 원곡 김기승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서예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때가 무림의 나이 20세 때이다.

무림 김영기 회장은 국내 서예계에서 최연소 기록을 모두 갖고 있다. 16회 국전 입선 이후 연거푸 8회 입선이란 대기록과 함께 1981년 초대작가가 된다. 이는 국전 30년 역사상 65명의 초대작가가 배출됐지만 김 회장이 최연소자로 아직까지 서단에서는 신화적인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보다 무림의 진가는 바로 철학이 있는 글씨와 혼이 담긴 우리나라의 서체를 개발하여 이를 완성시킨 대가이기에 한국 서단에서 젊은 나이였지만 최고의 서예가로 그 위상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림은 ‘글씨를 쓰면서 철학으로 삼은 게 있다. 각종 공모전에 가보면 왜 중국사람의 글씨만 보고 쓰고 하면서 경쟁은 한국사람끼리 해야 하는지 의문이 갔다. 도대체 우리나라에 우리의 서체가 없는 걸까?...’ 끊임없는 고민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해서쪽을 쓰는 서예가가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은 무림은 1977년 해서로 국전에서 특선을 하면서 이후 27~28회 연속 특선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중국의 서예를 따라 잡고 능가해야겠다는 강한 소신을 갖게 됐다”는 무림 김영기 회장.
1991년 한국서예문화후원회 창립총회. 21c부여신문

초대작가가 된 후 무림은 일찍부터 서단 일을 맡게 된다. 1981년 문화부에서 주관하다 민간주도로 문협·미협에서 하면서 1990년 문제점을 발견하게 됐고, 원로들의 자문을 얻어 대한민국 서예인 3천여 명이 동참한 한국서예가총연합회를 결성해 미협에서 독립하려 했으나, 서협도 따로 단체를 결성하면서 무림은 한국서가협회를 창립하게 된다.

당시 한국서가협회 창립에는 원로 서예인이 80~90% 참여하며 힘을 실어주었고 공모전을 투명하게 심사하게 됐다. 이후 한국서도협회를 결성해 현재 18년째 공모전을 실시해오고 있으며, ‘실명 심사제 도입’으로 그 실력을 입증받도록 하고 있다.

“비록 서예계가 4개의 큰 단체로 나뉘어졌지만 서예계에서 개혁적인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기에 오늘날의 서예가 국민들에게 사랑받게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절대 후회가 없다”면서 김 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최근 들어 서예가 위기니 침체니 하며 떠들어 대고 있으나, 나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현재 전국에는 수많은 서예학원이 있고, 어느 특정인이 좌지우지하는 서예가 아니므로 비로소 서예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며 무림의 눈동자는 빛이 났다.

무림은 서예인이 해야할 일로 세 가지를 주장한다.

그 첫 번째는 ‘서예의 역사성’이다. 일반 사람들은 서예를 마치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정도로만 여기는데 이건 어불성설이다. 서예는 역사와 함께 수 천년 전부터 내려왔다. 진시황 때 중국이 통일됐지만 한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럼 진시황 이전 3천년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조상들이 쓰던 한문이요, 바로 5천년 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아니던가!

우리나라 울산의 암각화 같은 경우가 바로 우리 서예의 시조이다. 글씨와 상용문자이다. 금성문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역사를 찾을 수 없다. 땅 속에서 출토돼야 한다. 아마 북한에는 분명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서예는 우리의 역사를 재현시키는 최고의 가치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서예과’이다. 바로 초·중·고에 서예과목이 부활되야 한다. 1960~1970년대에는 서예과목이 있었는데 현대에는 사라져 대단히 서글픈 현실이다. 직접 글씨를 쓰면서 수양을 하고 정서를 기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서예의 예술성’이다. 제대로 알거나 느끼거나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서예가 문장이나 옮겨놓은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 서예를 ‘정신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나는 ‘천상의 예술’이라고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운동, 바둑, 예술 등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세계를 제패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지만, 서예는 평생을 쓴 사람에게 글씨가 자신있냐고 물으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하기에 글씨는 최고의 경지를 가기 위한 수양인 것이다. ‘천상의 예술’이란 불교에서 말할 때 깨달음을 얻으면 경지에 오르듯 서예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도의 예술’이다.
무림의 붓끝에는 대한민국의 혼과 힘이 들어가 있다. 21c부여신문

중국에는 그 시대에 따라 깨달음을 말하는 대가들이 있다. 나 또한 7~8년 전쯤 조금의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무언가 스쳐간 기억 이후 글씨가 보이더라.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의 예술’이다.

최고의 예술을 현실로 인식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글씨가 좋은 예술이기에 후대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역사적으로 서예가 금성문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큰 자산이기에 막중한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20년간 중국과 교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서예를 중국 최고의 자존심으로 홍보하고 있으나 우리의 서단에도 그들에 못지 않은 대가들이 있다. 서단에서도 큰 책임이 있지만 정부에서도 서예를 잘 모르기에 제대로 심의도 못하는 지금의 실정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예를 들어 광화문 현판, 세종대왕상, 국쇄 관계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후대에게 물려줘야 하며, 앞으로는 우리나라 서예가 중국과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서도 으뜸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지금까지 한국서단을 이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범양그룹 박희택 회장께서 계셨기에 한국 서예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박희택 회장의 조건 없는 23년간의 후원이 바로 우리의 서단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늘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이제 서예에서 깨달음을 찾으면서 한결 마음의 여유가 찾아오고 있다. 핑계 같지만 너무 앞만 보고 바삐 달렸기에 고향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고향 부여에는 나의 어머님께서 살아계시고 형수님도 계시다. 더 늦기 전에 고향에서 해야 할 일들도 있다. 故 원곡 김기승 선생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기에 앞으로는 여기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부여는 내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태어난 곳이며, 내 스승께서 계신 곳으로 한국 서예의 본산이라 생각한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260여평의 서실에는 묵향 가득히 무림의 자취를 느끼게 했다.
만복집문. 21c부여신문

무림 김영기 회장은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사적비문, 천안 유관순 열사 사우와 초혼묘 글씨, 경남 김해 김수로왕릉 중수비문, 설악산 백담사 금강문과 범종루 글씨, 강원도 영월 법흥사 글씨 등 전국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故 김대중 대통령의 묘비와 추모비문을 원곡체로 써 더욱 유명하다.
천안 목천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 기념비 글씨. 21c부여신문

또한, 국회의사당 민원실에 ‘국민과 함께하는 민의의 전당’ 글씨도 김영기 회장의 작품이며, 재경부여군민회 부회장을 맡아 각종 행사 시 작품을 기증하는 등 군민회 발전과 장학기금 모금에 남다른 헌신을 해왔다. 특히, 부여신문 창간 7주년 기념식에 ‘정론직필‘, ‘왕도활안’의 작품을 기증하기도 한 부여가 낳은 한국 서단의 국보이자 자랑스러운 부여인이다.
무림 김영기 약력 21c부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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