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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⑥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⑥
  • 소종섭
  • 승인 2014.07.16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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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지공-나옹-무학대사 승탑 보며 불법(佛法)의 진리를 탐구하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고려 말~조선 초 최대의 사찰로 지공, 나옹, 이성계, 무학, 보우 등의 자취가 서린 회암사는 조선 초 불교계를 지탱했던 중심사찰이었다. 김시습은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21c부여신문

회암사지 21c부여신문

회암사지 박물관 모형 21c부여신문

동별실에 머물며 <원각경> 읽고 크게 감명 받아

늙은 소나무와 등나무는 보이지 않게 서로 이어져 뻗어나가고
한 가닥의 길은 깊고 깊어 신선이 사는 곳에 들어가네.
불전(佛殿)은 삼세(三世)를 불사를 만큼 남아 있는데
법문(法門)은 5종(宗)의 선(禪)이 끊어졌구나.
한껏 가파른 누각은 닫아걸어 인적이 끊어졌고
풀은 뜰에 쓸쓸히 떨어져 양탄자를 만들었다.
위치와 경치는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이 뛰어나건만
법등(法燈)을 이끌어 전할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쓴 ‘檜巖寺(회암사)’라는 시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 그를 도와 불교 중흥을 꾀했던 태고 보우(1509~1565)가 유생들에 의해 탄핵되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조선 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보우 국사가 죽은 뒤 회암사는 불에 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김시습 선생이 회암사에 들른 때는 회암사가 사라지기 한참 전이지만 선생은 이미 법등(法燈)을 이끌어 전할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회암사가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명종 4년인 1174년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왕래하였다’라는 <동국여지승람> 기록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회암사는 12세기에 이미 외국 사신이 찾을 만큼 상당한 규모의 위상을 갖고 있었던 대사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김시습은 회암사에 두 번 들렀다. 그가 처음 회암사에 간 것은 1459년,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1453년 19세 때 중흥사에서 방랑에 나선 이후 6년 만이었다. 그 해 겨울 선생은 회암사 동별실에 거주하면서 참선을 했다. 틈틈이 인근 수락산, 소요사, 삼각산에도 들렀다. 김시습은 회암사에서 지공대사의 가사와 바리떼를 보았고 나옹 선사의 가사와 바리떼도 참배했다.

김시습은 회암사에서 처음으로 <원각경>을 읽었다. <원각경>은 원래 이름이 <배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인데 석가여래가 문수·보현·원각·미륵·현선수 보살과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을 빌려 원돈(圓頓·원만하고 단번에 진리를 깨닫는 것)의 진리와 그를 위한 깨달음과 수행법을 설법한 내용이다.

<원각경>은 <화엄경>과 달리 오경(悟境·깨달음의 경지)에 몸을 두면서도 여전히 긴 꿈에 빠져 있는 인간의 실존 자체를 해명하는데 중점을 둔다. 소박하고 반성적이다. 부처의 얘기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냈다는 말도 있으나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는 대승(大乘·큰 가르침)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는 <원각경>이 그리 널리 보급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김시습은 <원각경>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도 선(禪)이나 교(敎), 어느 하나보다는 둘을 병행하는 것이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김시습은 회암사에 머물던 고승 혜사로부터 불교의 가르침을 배웠다. 혜사의 자세가 진지하고 설하는 내용이 깊이가 있어 김시습은 불교에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 그는 “부처의 가르침이 이토록 오묘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김시습은 고승 혜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평소 자신이 갖고 다니던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었다.

김시습이 두 번째로 회암사에 들른 것은 1465년 그의 나이 31세 때이다. 경주 금오산에 머물던 그는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주에서 서울로 상경했을 때 바로 내려가지 않고 도봉산 근처에서 여름을 보냈다. 서거정과 교유했고 회암사와 천마산에 있는 여러 산사를 주유했다. 승려 계담이 그를 따랐다. 그 해 가을에야 금오산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기록에 따르면 김시습은 회암사에 두 차례 들렀다. 하지만 선생이 회암사에 들른 횟수는 더 많을 것이다. 성종이 즉위한 뒤 세상에 나아갈 기회를 엿보며 인근 수락산에서 한 동안 머물렀을 때도 회암사를 오갔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회암사는 그냥 사찰이 아니라 왕실 사찰이었고 김시습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지공 선사와 나옹 혜근 선사의 사리탑이 있는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회암사를 창건한 지공 대사 21c부여신문

지난 번 ‘관서기행’ 편에서 언급했듯이 김시습은 관서기행에서 인도에서 온 승려 지공(1300~1361) 선사의 자취를 만난다.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마가다국의 왕자였던 지공의 법명은 디야나바드라(선현·禪賢)였다. 8세 때 나란타사에 출가해 삼장의 교학과 계율 등을 익힌 뒤 19세에 졸업했다. 그 후 그는 불법을 알리는 긴 여정을 떠났다. 인도, 네팔, 티베트를 거쳐 중국의 청해, 서안에서 불법을 편 뒤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로 갔다.

1326년 3월 원나라 황제의 배려로 금강산에 향을 사르기 위해 개성 감로사에 왔다. 금강산을 다녀온 뒤에는 개성 동쪽 숭수사에 주석하는 등 우리나라 각 지역에 불법을 전파했다. 이때 지공은 회암사에 들렀다. 그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수계를 받으려는 백성들이 하루에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승려들도 그에게 가르침을 구하여 수많은 추종자가 생겨났다. 이들 중에는 나옹 혜근 선사처럼 훗날 원나라까지 가 가르침을 구한 이도 있다.

조선시대 문인인 김수온이 쓴 <회암사중창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

예전 천력 연간에 서천박가납제존자(지공)는 이 절터를 보고‘서천의 나란타사와 꼭 같다’고 했다. 또한 ‘가섭불 때에 이미 큰 도량이 되었다’고 했다. 이에 먹줄을 잡아 측량하여 자리를 정할 때에 오래된 주추와 섬돌을 발견했다.

고려 말에 이미 터만 남아 있던 회암사를 중창하려던 지공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제의 명에 따라 원나라로 돌아갔다. 1363년 원나라에서 입적했는데 유골 중 일부가 1370년 개경으로 옮겨졌고, 1372년 9월 10일 왕명에 따라 회암사 부도탑에 안치되었다. 그는 인도, 중국, 고려에서 이름을 떨쳤던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다.

김시습은 관서기행 이후 관동기행, 호남기행, 영남기행에서도 지속적으로 지공선사의 자취를 좇는다. 지공선사의 법맥은 나옹 혜근선사-무학대사로 이어진다.

나옹 선사는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21c부여신문

나옹 선사의 승탑 및 석등. 김시습은 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21c부여신문

김시습, 지공· 나옹 선사에게서 깊은 인상 받아

나옹 혜근(1320~1376) 선사는 고려 후기에 활동한 고승으로 생전에는 ‘살아 있는 부처’로 칭송 받았고 사후에는 큰 이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회암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344년 이곳에서 출가했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뒤 돌아와 신광사와 청평사, 금강산 등지를 다니며 간화선을 제창했다. 간화선은 화두를 근거로 깨달음을 구하는 참선법이다.

나옹은 원나라에서 고려로 옮겨 온 스승 지공 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추모하는 법회를 열었다. 당시 고려는 화엄종을 중흥하려던 신돈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나옹은 그와 다른 선종 세력의 거물이었다. 신돈이 실각하면서 공민왕은 나옹을 왕사(王師)로 책봉한다. 나옹은 이듬해 가을 스승의 유골을 회암사로 옮기기를 청한다.

회암사에 지공의 승탑을 세워 스승의 유골을 안치하면서 회암사 중창이 시작됐다. 1374년부터 시작된 회암사 중창은 1376년 4월 15일 되어서야 끝난다. 이날 낙성식이 열렸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들은 회암사에서 열린 대규모 문수법회를 못마땅해 했고 이로 인해 결국 나옹은 왕사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해 5월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는데 당시 오색구름이 뒤덮었고 사방에 비가 내렸다고 전해온다.

문도들이 화장해 사리 115과를 수습했는데 극락왕생을 비니 순식간에 사리가 558과로 늘어났다고 한다.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의 승탑을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대중의 신망과 스승의 권위에 힘입어 불사를 계속했다. 김시습은 나옹의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던지 훗날 그를 찬미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회암사에는 무학대사의 승탑도 있는데 그는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핵심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원나라에 유학했을 때 지공과 나옹을 만나 불법을 공부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면서 이성계로부터 왕사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회암사 주지로 부임했다. 회암사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 대사찰로서의 위용과 권위를 잃지 않았던 데는 무학대사의 역할이 컸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1393년에 회암사 주변에서 역질이 발생하자 무학대사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게 했다. 이후에도 수시로 신하를 보내 안부를 묻거나 곡식이나 포 등 재물을 보냈다. 1397년에는 아직 입적하지도 않은 무학대사의 승탑을 미리 만들도록 했다.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준 이후인 1402년에는 태종에게 회암사를 중수할 것과 자신이 머물 궁궐을 지으라고 하고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태종실록>권3, 태종 즉위 2년 6월 9일자 기록은 이를 이렇게 전한다.

태상왕께서 소요산으로부터 회암사로 거동했다. 태상께서 회암사를 중수하고 또 궁실을 지어 머무시고자 하니 주상께서는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대부(隊副) 150명을 부역하러 파견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로부터 계를 받은 이후 불교도로서 살아가며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죽은 뒤 금강산 금장암에서 일생을 마쳤다. 회암사에는 이처럼 지공-나옹-무학대사의 사리탑이 있다. 나옹은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측면에서 김시습에게는 참으로 남다른 의미를 갖는 사찰이었을 것이다.

경기도와 양주시는 현재 회암사를 복원하는 대역사를 진행하고 있다. 1997년부터 15년 간의 발굴 과정을 거쳐 옛 회암사지의 모습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찾아낸 유물들을 바탕으로 2012년에는 회암사지 박물관을 개관했다. 지금도 회암사지 복원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보기 드문 대가람과 지공-나옹-무학대사 승탑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기에 최근 회암사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는 회암사 주지를 지냈다. 21c부여신문

무학대사의 승탑과 탑비. 이성계는 무학대사 생전에 승탑을 만들도록 했다. 21c부여신문

회암사 떠난 김시습, 다시 관동을 향해 방랑길

1460년 봄, 26세의 김시습은 다시 길을 나서 관동으로 갔다. 왕심역, 도미협(지금의 팔당), 용진, 월계협을 거쳐 양평, 여주, 원주를 지나는 행로를 택한다. 팔당을 건너면서‘渡迷峽(도미나루를 지나며)’이라는 시를 지었다.

도미나루 물은 이끼보다 파란데
관동 가는 길 멀기도 멀구나.
등 뒤에 지팡이 비껴 메고 사람 돌아보지 않으며
맑은 강 그림자 속에 부질없이 배회하네.
강물이며 강에 핀 꽃 눈에 아른거리고
쌍쌍이 나는 갈매기와 술잔을 함께 하네.
나는 본래 담박하고 호탕한 사람
만 리를 내 집 삼으니 마음 넓디 넓어라.
지팡이 의지해서 골짜기 사이 가며
노래하고 껄껄 웃다 괜시리 머리 드네.
살아생전 벼슬도 바라지 않고
죽어 명성 남기기도 원하지 않네.
짚신 해지도록 떠다니다 스러지려 하니
오직 바라는 것은 은자(隱者)로 기억되는 것,
솜 같은 봄 구름에 봄바람 일렁이면
훌쩍 소매 너울대며 강물 건너지.
때마침 흰 새 한 쌍 날아가더니
해맑은 강가에서 울며 나를 기다리네.

김시습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에도 잠시 들렀다.

푸르고 높고 엄숙한 용문산
쓸쓸한 절을 층층이 안개가 감싸고 있네.
달빛 아래 늙은 학은 높은 소나무에 홀로 깃들고
맑은 샘물은 한가로이 쉬지 않고 흐르네.
범종소리는 두보의 시에 깊이 잠기었고
물결 그림자 너머 물고기가 뛰어오르네.
바람타고 산꼭대기 넘으려고 하다가
흰 구름 쌓인 속에 푸른 행전만 허비했네.

용문사는 세조와도 인연이 있는 사찰이다. 수양대군 시절이던 세종대왕 29년(1447) 이곳을 찾아 고인이 된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이곳에 보전을 짓고 불상 2위와 보살상 8위를 봉안했다. 수양대군은 이듬해 다시 용문사를 찾았는데 여기에 있던 부처의 사리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는 이곳을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왕이 된 뒤에는 4년이 지나 용문사의 법당과 승방을 고쳐 짓도록 하고 구리로 만든 종을 보시했다.

용문사를 떠난 김시습은 여주 신륵사로 간다. 나옹 혜근 선사가 입적한 곳이다. 이어 치악산 각림사로 간다. 각림사는 조선 태종이 어릴 때 찾아와 공부했던 사찰로 태종은 즉위 이후 사찰 공사에 필요한 목재 등을 지원하고 직접 이 절을 찾기도 했다. 선생은 방림, 대화, 진부역을 지나 오대산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는 오대산이야말로 자취를 감출만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김시습은 작은 집을 짓고 오대산에 머문다. 방랑을 떠난 이후 그가 집을 짓고 머문 곳은 오대산이 처음이었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ㄴ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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