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귀중한 금석문 자료
14.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 충남 유형문화재 제101호,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2011-11-26 한봉규 부여박물관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충남 유형문화재 제101호,(너비: 38㎝, 두께: 29㎝, 높이: 102㎝)
삼국시대 금석문 자료 중 특히 백제시대의 금석문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1948년 부여읍 관북리 官北里의 도로변에 읍내에서 건물의 초석이나 지대석 등을 쌓아 놓았던 돌무지 속에서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비석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비석은 대좌평 大佐平의 벼슬을 지낸 고위 관료인 ‘사택지적 砂宅智積’ 이란 인물이 정계에서 물러난 후,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사찰을 건립하여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세운 비로 상당부분 훼손 결실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비석은 화강암의 한 면을 평평하게 잘 다듬어서 약 7.6㎝의 정사각형을 일정한 간격으로 정간 井間 구획하여 그 안에 글자를 비교적 크게 한자씩 새겼다. 현재 있는 비문의 글자는 비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4행이 남아 있다. 1행의 글자는 14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글자는 모두 56자만이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비의 오른쪽 면의 윗부분에는 지름이 20㎝ 가량의 원을 새겼으며, 그 원안에는 봉황문을 음각으로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에 유행하였던 사륙병려체 四六騈儷體이며, 글자체는 구양순체 歐陽詢體이다. 비문의 내용은
?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悲?含聖明以
(?인년정월9일내지성사택지적은
몸이날로쉬이가고달로돌아오기어려움을슬퍼하고서럽다
금을캐어진귀한건물을짓고옥을파내어보배로운탑을세우다높고높은자애로운모습은
성스러운빛을내어구름을보내고아아한슬픈모습은성스러운밝음을머금어.....)이다.
비문에서의 사택지적은 백제 8대성씨(大姓八族) 귀족가문의 하나인 사씨 沙氏와 같은 것으로 성은 사택 砂宅이고 이름은 지적 智積이다.
사택지적은「삼국사기」,「삼국유사」등 국내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서기」권24 황극 2년(642년: 의자왕 2년)조에 의하면 대좌평 지적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여기에서 보이는 대좌평 지적은 사택지적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사택지적비는 의자왕 14년(654년)에 만들어진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금석문으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사륙병려체 四六騈儷體 : 중국 6조시대(229∼589)에 유행한 문체로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가 한 구절이 되는 것이 많아 사륙체 四六體라고도 한다.
구양순체 歐陽詢體 : 중국 당나라대의 서예가 구양순이 만든 서체로 글자모양이 정사각형 틀안에서 쓴 것처럼 네모 반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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