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며...
2013-05-23 박철신
왜 ‘무’라고 답했을까? 개가 무슨 불성이 있어서 깨닫는다는 말인가? 개가 성불(成佛:부처가 됨, 해탈, 깨달은 상태)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개는 죽고 난후 윤회하여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절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으니 불성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조주화상이 ‘무’라고 답한 것이 맞다. 이렇게 해석했다면 하근기(下根機· 초보자)이다.
성인께서 말하지 않았던가? 우주 만물의 모든 생명체엔 불성이 존재한다고 했으니 끊임없는 노력이 시절 인연과 맞아 떨어지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이 없다란 뜻으로 ‘무’라고 말했다면 조주화상은 잘못 말한 것이다.
‘개에게도 불성은 있다’라고 말해야한다. 이렇게 해석했다면 중근기(中根機, 중급자)이다. 생사윤회와 열반이 함께 적멸한 자리가 바로 여여(如如)한 공(空)의 자리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은 생성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이라는 주체도 없고 성불이라는 객체도 없는 것이니 ego, 자아(自我)는 물론 불성, 유와 무, 생과 사 조차도 도(道)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일 뿐 그것마저도 결국 인간이 지어낸 유위법인 거짓말일 뿐, 불성이란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조주화상이 그저 ‘무(無)’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했다면 상근기(上根機, 상급자)이다. 부루나존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다르다고 남이 부루나존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 침 뱉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침을 바로 닦아내면 그 사람의 분노가 더 일어나니 침이 마를 때까지 그대로 놔두었다고 한다. 이정도 되어야 하심(下心·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찌개나 국이 식은 뒤 맛을 보아야 짠 맛인지 싱거운 맛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뜨거울 때는 짠 맛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홧김에 결정하면 오류가 많다. 열정이 식은 뒤 냉정한 마음으로 결정해야 백로인지 백조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화가 날 땐 거울을 보라 자신의 화내는 모습을 지켜보면 더 이상 화낼 수 없게 된다. 생각만 내려놓으면 참된 나를 찾을 수 있다. 참된 ‘나’란 ‘나’라는 존재가 본래 없었음을, 고유한 ‘나의 실체와 본성’이 본래 없음을 보는 것이니(무자성·無自性), 그것이 바로 무아(無我)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인생의 시작과 끝이 아니다. 구름의 전생은 물이었고 종이의 전생은 나무였다. 시간과 공간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생명체는 세포 분열 할 때부터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행동한다. 갓 태어난 눈도 못 뜬 강아지들을 보라. 본능적으로 어미젖을 더 많이 먹겠다고 살기 위해 서로 밀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루만 굶으면 몸속에 있는 세포들은 배고프다. 그때 식사를 하면 세포들이 힘껏 영양분을 빨아먹는다. 먹고 남은 것은 배고플 때를 대비해서 몸의 이곳 저곳에 지방으로 저장한다. 이것이 탐욕스런 세포들의 요요현상이다.
따라서 하루에 한끼를 폭식하는 사람은 체중감량에 실패한다. 자연 그대로가 진리이니 탐욕스런 인간의 마음을 닮지 마라. 탐욕스런 마음, 옹졸하게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마음, 그리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여의고 닫혀있던 마음을 열어, 나와 자연, 우주가 소통하며 하나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세상의 이치를 알면 전생과 과거가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부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 곁 우주만물 속에 여여히 베어 있으니 우리는 눈만 뜨면 알아 차릴 수 있는 것이다.
눈을 떠라!
박 철 신 충남의사협회 부회장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