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제5화국공의 시녀들
2013-09-05 이규원
1979년 11월 부여군 내무과 병사계에서 행정계로 이동하여 보안의전민원경리군수정판비 인사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어 허리 필새 없을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新軍部) 정치일정 까지 겹쳐 필자는 젊음을 사무실에 묻어야 했다.
10.26사태 이후 1979년 12월 6일 제10대 최규하 대통령 선출, 12.12사태, 1980년 5.18광주사태(민주항쟁), 8월 27일 제11대 전두환 대통령 선출, 10월 22일 개헌국민투표, 1981년 2월 11일 대통령선거인 선거, 2월 25일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선출,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이상익, 조중연) 등 긴박하게 진행되는 정치 지원업무는 군수, 경찰서장, 교육장, 3대대장보안부대요원으로 구성된 지역 대책회의에 하달되고 행정계에서 처리하였다.
고향 초촌(草村)에서 통근하지 못하고 군청 코 앞에 하숙하던 1980년 여름 어느 날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논산 하산부인과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가 출생 14일 만의 둘째 아들 생면(生面)이었고 호흡곤란 상태로 눈물짓는 아내 앞에서 난감(難堪)하였다.
해마다 8월이면 지금처럼 을지훈련을 하였다. 도청에서 1일 교육 받고 1개월 쯤 준비하여 6일간 전직원을 24시간 교대 근무하게 하는 전시대비 행정지원훈련 총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업무 지금은 민방위계와 서무계 거쳐 재난민방위계로 이사하였다.
1년에 한 번 꼴로 교체되는 군수는 초도순시를 하였다. 이근영(전 천안시장) 군수가 보건소 순시 티타임 때 긴장한 여직원이 탁자 난간에 커피 쟁반을 올려놓고 안쪽 잔부터 들어 올려 커피 잔이 군수 발등으로 떨어지는 돌발상황 벌어졌으나 오히려 그 직원 위로하여 수습하는 군수의 기지(機智)를 배우기도 하였다.
정부는 주요 정책 성과를 단기간에 올리기 위하여 인사담당부서를 활용하였다. 가족계획(산아제한), 산림내 불법건축물 철거, 사회정화사업을 행정계에서 맡도록 하여 궤도에 진입시킨 후 원래 담당부서로 이관시키는 방식이었다.
민선군수 이후 인사담당과장은 물론 부군수도 인사영향력 거의 없지만 국가에서 군수(서기관)를 발령하던 시절에는 행정계장 권한이 막강하였다. 하위직 결원 되었을 때 실무자에게 위임해주어 읍면에서 병사업무 깔끔하게 처리했던 손병우(계장 퇴임) 씨, 신승룡(면장 퇴임) 씨, 김낙현(대전광역시 국장 퇴임) 씨를 발탁하는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승진인사에서 탈락한 직원들한테는 화풀이 과녁이 되어 혈압 올라야 했다. 어느 날 동료들과 역마차 다실 아래 칼국수 집에서 점심 때우고 나오는데 술 취한 S 씨가 펀치 날릴 때 피하지 못했던 그림 지금도 생생하다.
부여는 ‘고란사가 피풍(皮風)’이라는 말이 있다. 상급기관에서 휴가나 감찰이 있을 때 빼놓지 않고 방문하기 때문이다. 내무부나 도청 직원들과 친분 쌓아두면 업무처리에 크게 도움 되지만 그 비용이 문제였다.
행정계 전입 시 인계 받은 채무 700만원(당시 집 반채값)도 그런 관계였다. 3년간 허리띠 졸라매어 150만원으로 줄여놓았던 1982년 연말 계장(조종학, 유성구 국장 퇴임)은 당진군 과장 요원으로 전출되고 필자는 6급 승진되어 떠날 때 관행대로 전입하는 인사실무 후임자에게 잔여채무 150만원을 인계하려 했으나 인수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옆자리에서 딱한 사정 넘겨다보고 있던 예산계장(우제철 대전광역시 과장 퇴임)이 ‘빚 갚을 예산 세워 줄 테니 인수 하라’고 대안을 제시해도 후임자(박00)와 신임 행정계장(이00)은 끝까지 매몰차게 외면하였다. 사채(私債) 얻어 청산하고 수년 동안 그 돈 갚느라 멍청한 청춘은 고통 받아야 했다.
이 규 원 전 부여군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