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직리 고인돌. 탑이 되고, 다리가 되고…

2013-12-12     윤재환

1986년 여름 즈음, 부여군 초촌면의 산직리에 큰 지석묘가 있다하여 찾아갔던 적이 있다. 석성면의 십자거리로 해서 공주 쪽으로 들어가다가 마을 길로 들어서니, 어느 집 뒤쪽 언덕 있는 곳에 덩그러니 상당히 크고 널쩍한 바위가 받침돌 한 켠에 의지하여 기울어져 무성한 풀과 함께 있던 모습으로 기억이 남아 있다. 그 당시 ‘상당히 큰 고인돌이 부여에도 있구나’ 하는 것과 ‘보존이 잘 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후 서울에서 살면서 강화도의 부근리 지석묘가 거대하고 멋지게 서있는 것도 보았고,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보았다.

실상 고인돌은 무덤으로서의 기능(무덤고인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단으로서의 기능(제단 고인돌), 무덤의 경계를 나타내며 묘역을 만든 집단의 권위와 힘을 드러내기 위한 묘표석으로서의 기능(묘표석 고인돌)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기능은 물론 동일 유적 내에서도 다양한 묘제로 나타나기도 한다.(주1)



이러한 고인돌(지석묘)은 고고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전세계에 현재 5만기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있는데, 절반 이상인 3만여기가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인돌들은 주변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유구가 발견되지 않아 덩그러니 다량의 고인돌로만 외로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부여 산직리 고인돌(1982년 충청남도 지방기념물 제40호로 지정)은 불과 2킬로여미터 떨어진 구릉에 같은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송국리 선사취락지가 발굴되어 동시대 청동기인의 교류와 생활상 등을 유물과 집터 등으로 엿볼 수 있어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발견 당시의 이야기를 동네 토박이인 인국환(70) 선생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1974년 당시 도굴꾼들은 산직리의 이곳 저곳을 자주 파보았다. 생업에 바쁜 동네 사람들은 무심히 남의 일이려니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전주 이씨 종손인 이응상 씨 집 주위 선산 묘역 주변을 사람들이 삽으로 파는 것을 보고 왜 남의 묘 주변을 파느냐고 그러지 말라 했다. 그러나 며칠 후 또 파헤쳐진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나와 석관묘 수습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요녕식 동검인 비파형 동검 등이 발굴되었다. 도굴꾼들 중 1명은 진오리 사람으로 길 안내를 했고, 외지인이 2명 더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모두 수감생활을 했고 이젠 그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1974년에 이렇게 도굴꾼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국가사적 제249호인 송국리 선사취락지 유적(80만㎡)은 석관묘 수습 조사(요녕식 동검, 동착, 옥, 마제석검, 마제석촉) 이후, 2011년까지 30여년 동안 14차례에 걸쳐 집자리 옹관묘 탄화미 목책시설 주거지 수혈유구 등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어 청동기시대부터 이 터에서 이어져 살아온 사람들에 생활모습의 편린들을 많은 부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발굴은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편, 최몽룡 교수는 송국리 유적의 편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도 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로 살펴보면 부여 송국리 유적은 공렬토기의 청동기시대 중기(기원전 1000년~기원전 600년)에서 시작하여 경질무문토기가 출토하는 청동기 후기(기원전600년~기원전 400년)가 중심이 된다. 여기에서부터 마한의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400년~기원전 1년)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즉 자연스럽게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송국리 유적이 딱 들어맞는 연구결과들이 계속 도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1991년~1992년 사이에 발굴조사를 하였으나 아무런 유구도 나오지 않았던 그래서 제단고인돌(무덤방이 흔적이 존재하지 않음)로 추정되기도 하는 2기의 부여 산직리 고인돌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발굴보고서상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고임돌 4개 중 1개에만 걸쳐서 비스듬히 누워 있고 덮개돌 윗부분은 돌을 깰 때 정으로 나란히 파 놓은 홈이 일렬로 파여져 있다. 재질은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흑운모 편마암으로 크기는 동서 370cm×남북580cm×두께130cm이고, 추정 무게는 73톤에 달한다.

그런데 덮개돌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크기 그대로라면 4개의 고임돌 위에 반듯하게 놓여 보존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덮개돌이 4개의 고임돌에 올려지는 크기보다 작아 한쪽 고임돌에만 걸려 있고 나머지 3개의 고임돌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덮개돌이 사람들의 힘에 의해 깨어져서 다른 용도로 사용이 되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자연스럽게 덮개돌이 파손 되었다면 주변에 깨진 파편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돌의 대략 1/3 정도가 더 있어야 덮개돌이 4개의 고임돌에 완전히 올려지는 크기로 추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산직리 고인돌이 화강암으로 된 탁자식 강화 고인돌(길이 650cm, 너비 520cm, 두께 120cm·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사적137호) 보다 더 큰 규모의 고인돌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잘려 나간 이 돌들은 어디에 있을까?

동네 토박이인 인국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신이 어렸을 때인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동네 앞에 흐르는 금강의 지천인 석성천에 돌다리를 놓았다. 이때 이 덮개돌을 좁고 길게 쪼개서 사용했다는 얘기를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덮개돌 윗부분에 돌을 깰 때 미리 정으로 좁고 길게 나란히(130-170cm 폭) 파놓은 흠집의 흔적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돌다리가 있던 주변의 개천 바닥을 조사해 보면, 사용된 돌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찾아서 고인돌의 옆에 가져다 놓으면 고인돌의 원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발굴보고서상 2호 고인돌이 있는 토지는 초평리에 사는 지상설 씨(약110세 사망) 소유의 선산인데, 지 씨의 선친 지창영 씨가 고인돌 밑을 파보았는데 석기와 그릇 종류가 나왔으나 쓸모없다고 한 쪽에 버렸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또한 고인돌의 덮개돌 밑에 약 1.5미터 깊이로 두어 평 넓이로 굴을 파 그곳에서 책도 읽었다고 한다. 그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도 홀로된 사람이 기거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이곳 산직리 고인돌에서 직선거리로 약 7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세탑리에 오층석탑이 있어 구경하러 갔었다. 도로가 끝나는 산 밑에 개인집(재실을 20여년 전부터 가옥으로 사용)의 마당 한 켠을 차지하며 덩그러니 탑 1기가 놓여 있었다. 바로 ‘세탑리 오층석탑’(부여군 초촌면 세탑리 311번지·유형문화재 제21호)이다. 찬찬히 기단석부터 몸돌 옥개석 등을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보며 잠시의 시간을 보내던 중 2층으로 된 기단석 받침의 아래쪽 갑석(130cm×130cm×25cm)이 상당히 눈에 익어 자세히 살펴보니, 산직리 고인돌과 같은 재질의 흑운모 편마암으로 보였다.(더 자세한 것은 전문가들의 추가적인 학술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 그렇다면 원래 크기보다 작아져 1개의 고임돌에만 의지해 있는 산직리 고인돌의 덮개돌 일부가 고려시대 때 잘라져서 이 탑으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려시대 때 석탑은 세워야겠고 따라서 돌이 필요한데 멀지 않은 곳에 큰 돌이 있으니 이것을 잘라다가 탑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일이었으리라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산직리 고인돌은 최고 권력자의 무덤으로 신성시 할 목적으로 수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조성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고려시대 이 거대한 돌은 만들어질 당시의 상징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당시의 지배사상인 불교 성인의 무덤인 사리탑, 즉 석탑 건립을 위해 2차로 전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동네 앞 개천 위에 사람들이 다니기 편리하도록 튼튼한 다리를 만들기 위한 소통의 다리 재료로서 사용되었다. 현재는 고고학적인 발굴 등에 의해 청동기시대의 족장의 무덤 등으로 추정되어 문화재로서 발굴 조사 및 보존의 대상이 되어 있다.

시대에 따라 선캄브리아기(5억7천만 년 전 이전)에 형성된 흑운모 편마암이 각각 다른 문화 코드로 다르게 해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족장의 무덤으로, 성인의 무덤인 석탑으로, 생활에 편리한 돌다리로...... 그렇다면 다음 세대에는 어떠한 문화 코드로 해석이 될까?


윤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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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여팔경’ 저자
·(재)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이어령) 사무국장
·민학회 총무이사
·21세기 부여신문 자문위원
1962년생
백제초등학교 및 부여중학교 졸업
천안북일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경영학과 졸업(회계학 전공)

(주)대우 외환부, 섬유 경공업 사업개발팀 근무
(주)녹십자 기획조정실 근무

(사)한국종이접기협회 사무국장 역임
(사)문화우리 사무국장 역임
(주)도서출판 종이나라 이사 역임
이문학회(http://cafe.daum.net/imoon90) 총무 역임



※ 참고자료
▶ 부여산직리고인돌, 부여문화재연구소, (1993)
▶ 부여 송국리 유적의 새로운 편년, 최몽룡, 제38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2010.10)
▶ 세계의 보물 고인돌 국내에선 ‘애물’ 시사저널 [584호] (2001.01.04)
▶ (주1) 고인돌 보존관리의 문제점과 대책, 김영창(2005.04.04)-문화재행정모니터제도 부활 카페(http://cafe.daum.net/culturemonitor/1O8u/11?docid=1307Q|1O8u|11|20060102094717&q=%B1%B9%B3%BB%20%B0%ED%C0%CE%B5%B9%20%BC%FD%C0%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