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이 순간만이 중요하다
2014-01-09 박철신
하지만 홀어머니를 팽개치고 출가했다는 사실은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혜능이야말로 무책임한 불효자이다. 고타마싯탈타나 성철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처럼 인연을 쉬고 끊지 않으면 수행하기 어렵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마음 속으로 모든 인연을 정리해야 한다.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연인 등 모든 쇠사들의 고리를 끊는 사고의 변화가 없으면 번뇌에 휘둘려 살아야하니 대자유는 없다.
그나마 혜능이 깨달음을 얻어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였으니 불효를 용서 받을 수 있다. 만일 혜능이 깨치지 못했으면 중생들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일은 안하고 앉아서 참선한답시고 중생들에게 시주 빚만 지고 있으니 중생보다 못한 ‘밥도둑’일 뿐이다.
겁생의 최대 목표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다. 단풍이 짙게든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고 따뜻한 봄은 겨울을 억지로 밀쳐내지 않는다. 오고가는 그 진리. 밥을 먹는 것이 오는 것이라면, 배설하는 것은 가는 것이니 그저 자연스럽다. 태어나고, 이생에서 머물고, 죽고, 다시 후생에서 영(靈)으로 머무는 것은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그저 일상일 뿐이니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다.
우리가 죽으면 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영혼이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20~30분간 잠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게 된다. 옆에서 내 육체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가족의 모습도 보인다. 내 영혼이 내 육체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인간으로 살아있을 때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가까이 한 것을 참회하고 반성하게 된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육체가 없으니 공부하기 어렵다.
인간이었을 때 열심히 공부해 해탈의 자유를 얻지 못했으니 돌고 또 돌아야 한다.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옳지 않은 생각들을 뇌 속에 끊임없이 저장해 왔다. 따라서 뇌의 판단을 믿지마라. 뇌는 너무 탐욕스럽다. 보배는 허공에 가득한데 ‘없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린 움켜쥐고 절대 놓지 않는다. 현재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 순간이 공부하기 좋은 때이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자신이 전생에서 지은 업덩어리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은 내가 전생에 지은 악업의 댓가이니 남의 탓 할 것 없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은 전생의 선업 덕분이다.
내가 걸어다니면서 밟아 죽인 벌레가 몇이나 될까? 고승들은 굳이 짚신을 신었다. 벌레들이 짚신 사이로 피할 장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주장자를 ‘쿵쿵’ 내리치며 길을 걸으니, 뭇 벌레들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모르고 짓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이다.
항상 참회하고 반성하라. 그리해야 마(魔)가 끼지 않으니 정신이 맑아지고 공부에 장애물이 없어지고 깨닫기 쉬어진다. 강을 건너고 나면 타고 왔던 뗏목을 놔두고 뭍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무상(無常·세상만물은 머물지 않고 계속 변해간다), 고(苦·세상만물이 계속 변해간다는 사실도 모르고 나는 변치 않고 여기 머물러 있다는 착각으로 탐욕과 분노가 몸에 베어있으니 고통이다), 무아(無我·본래 나의 이름과 주민번호는 가짜이며 나라고 여기는 이 몸뚱이는 잠시 빌려 입은 가죽일 뿐이다) 이 세가지 무상, 고, 무아는 방편이다. 즉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일 뿐이다. 그 나침반을 이용해 깨달음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 나침반만 붙잡고 있다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깨닫고 나면 무상, 고, 무아는 그저 뗏목일 뿐이다. 깨치고 나면 공(空)이란 말도 거추장스럽다. 수억겁을 돌고 돌아 보아라. 지금 내가 육체를 가지고 숨쉬며 살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발심하기 좋은 소중한 시간이다.
박 철 신 충남의사협회 부회장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