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의회에서 청문회 하던 날
2014-05-14 이규원
1989년 3월 부여군에서 대전직할시 서구에 전입되어 배치된 곳은 총무과 건전생활계이었으며, 직원은 달랑 1명뿐이었다. 경리계에서 분대급 직원들과 부여군 살림살이 책임지던 것과 비교하니 허접스러웠다.
대전으로 이동할 때는 사무관 승진을 포기하였으나 마음이 변해서 부여군수로 모셨던 이병오 내무국장을 찾아가 “어떤 업무라도 자신있으니 시청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그동안 뽑아쓰지 못했던 넉살을 꺼냈더니 “알았어. 기다려”라고 명쾌하게 대답해주어 국장실 나오며 콧노래 부른지 한 달 만에(1989년 8월) 시청 사회과 노정계(勞政係) 차석자리로 발령 받을 수 있었다. 노정계는 노동부 협력부서로 노동조합설립신고처리, 노사분규사전조정알선, 직업안내소관리 등이 주요 업무였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쟁취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권 때도 불법시위 문화가 여전하여 혼란스러울 때였다. 쟁점마다 대학생, 노조, 좌파사회단체가 대전역광장에서 뭉친 후 시청으로 진격할 때 쏘아댄 최루탄 때문에 사무실에서 눈물 흘리며 몸살 앓는 조국의 현장을 체험해야 했다.
동료 직원이 전해주는 얘기 중에는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중구청 관할 택시회사에서 노사교섭기간에 노조간부들이 사장집으로 처들어가 욕설해대고 부인과 딸을 희롱(戱弄)하자 엽총으로 노조위원장을 쏴 죽여 재판 중’이라고 하였다.
사업장마다 매년 초에 시작하는 단체협약은 여름이 지나도록 타결되지 못하고 노동위원회의 직권중재로 결판나지만 그때마다 불복(不服)시위는 여전하였다. 노정계 근무 1년5개월 동안 토요일 오후에는 보건사회국장(송인봉 서기관)의 테니스 파트너가 되어 운동을 함께 하고, 근무평정점수 후하게 받아 승진후보자명부순위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무관 직무대리들의 승진시험 때마다 들러리 되어 시험포기서 제출을 요구받아야 했다. 1990년 9월에는 부시장(박OO)까지 나서서 말리는 것 뿌리치고 1차 시험에 응시(헌법행정법)하여 합격해 버렸다. 그리고 합격통지 받은 날 2차 시험포기서 주저없이 제출하여 ‘애저녁에 직무대리 자리 도루(盜壘)할 의사 없었음’을 보여주고 ‘미운 오리 새끼’ 면할 수 있었다.
1차 시험이 무기되어 1990년 12월 대덕구 토지관리과장 직무대리로 발령받게 되었다. 남들은 시험공부 하느라 자리를 자주 비워서 매스컴 탔지만, 필자는 2차 시험과목(행정학지역사회개발론)만 남았으므로 사무실을 비울 필요가 없었다.
“지방자치는 시도(市道)광역단체만 우선 시행하자”는 정치학자들의 간곡한 제안을 앙숙(怏宿)관계였던 야당의 두 맹주 YS와 DJ가 뭉개버리고, 패거리들 이득 챙기느라 전격 합의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1991년 3월 26일 시군구의회 의원까지 선거를 하게 되었다.
직할시의 구(區)는 ‘개발에 편자(말굽)’같이 어색하고 불필요(지금도 폐지여론 높다.)한 짓 이었다. 초장부터 구(區)의회에서 한다는 일이 1988년 이후 5공 청문회에서 전직 대통령에게 명패 던지며 행패 부리던 국회의원 패러디 하여 실과장들 세워놓고 청문회나 하는 거였다.
토지관리 업무는 국가위임 사무가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단체위임과 기관위임을 구분 못하고 기관위임 사무까지 질문할 때 “그 질문의 답변은 국가에서 해야 한다”며 답변을 거절하자, 의회를 무시한다고 구청장에게 항의하며 난리를 피웠다.
총무국장(최OO)은 “의원들 비위 거스른다”며 부옇게 나무랐고, 부구청장(최상옥)은 “당차게 답변하여 구청 자존심 지켰다”고 격려하였다. 구청장(송일영)은 표정 관리만 하였고, 직원들은 “오랜만에 스트레스 풀었다”며 환호하였다.
이 규 원 전 부여군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