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실의 화려한 역사’

5.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국보 제288호, 높이 74.0㎝

2011-11-09     한봉규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부여읍을 둘러쌓은 나성과 능산리 고분 사이의 능산리 절터에서는 1993년과 1995년에 백제금동대향로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등 사비시기(538년∼660년)의 백제 보물이 발견됐다.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이 발견된 곳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곳에서 20여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능산리 절터의 중심부에 있는 목탑지로 깊이 1.4m 지하에 묻힌 심초석(心礎石) 위에 심주(心柱)와 함께 비스듬히 뉘어져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사리감(사리를 모신 사리그릇을 넣은 감실을 말한다)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아랫면이 네모지고 윗부분은 무령왕릉의 입구와 같은 모양의 둥근 아치형태이다. 앞면과 뒷면에는 사리그릇을 보관할 수 있도록 감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발굴당시 사리감이 이미 교란된 상태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사리감 앞면 좌·우면에는 각각의 10자씩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그 뜻은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백제 창왕(昌王)은 제 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년∼598년)의 휘(諱)이며,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재위 13년 정해년(567년)에 그 누이(성왕의 맏공주 원주)로 하여금 관산성(管山城 : 충청북도 옥천 지역) 전투에서 비참하게 전사한 부왕(聖王)을 위령하기 위하여 능산리 고분 바로 옆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사리를 공양하였던 것이다.(창왕은 성왕의 아들로 위덕왕의 재위 때의 이름이고, 위덕왕은 죽은 후의 시호(諡號)이다.)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현존하고 있는 사리감 중 가장 오래된 사리 장치로 화려하게 꽃피운 우리나라 사리장엄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백제 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심초석(心礎石) : 탑 내부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받침돌)
심주(心柱) : 중심 기둥
휘(諱) : 돌아가신 높은 어른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