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단상] 백제정신②-서동왕자의 슬기(wit)

2015-07-07     21c부여신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 자연적 조건에서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나라는 백제이다. 주로 농업 생산력에 의존하던 당시에 평야지역인 한반도의 서남부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날 옛 백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넉넉하고 순수하며 기품 있는 특징을 갖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평야지대의 풍요로움과 평야지대를 흐르는 강물의 맑음과 이를 바탕으로 번영했던 백제역사의 문화적 깊이에서 영향을 받은 때문으로 생각된다.

다만 백제후예들에게는 옛 백제사람들에 비해 도전정신과 열정이 다소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을 사는 백제의 후예들에게 필요한 변화와 열정의 본보기가 될 만한 백제정신을 찾아보기 위해 서동(薯童)왕자의 슬기(wit)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동설화에 나타나는 서동왕자는 오로지 슬기(wit)로서 가난한 젊은이였으나 적국의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고 정치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백성의 신망을 얻어 왕위에 까지 오른 불세출의 영웅이다.

서동설화는 고려 충렬왕(1285) 때 일연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권2 무왕편에 등장한다. 일연스님이 기록한 서동설화는 옛 기록인 미륵사 창건 연기 설화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일연 스님은 삼국사기에서 빠진 야사를 기록하면서 삼국사기의 오류를 지적하는 등 역사학자적 관점을 지향했다. 서동설화에서도 백제왕에는 무강왕이 없다는 점,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로 되어있지만 설화에서는 과부의 아들로 되어있어서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마동이 실제로 백제 30대 무왕인지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 설화의 주인공인 무강왕은 무왕이 아니라 동성왕, 무령왕, 원효대사라는 주장이 있고, 특히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과정에서 출토된 사리장엄 봉안기에 사택왕비가 무왕의 장수를 기원하여 미륵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와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진실게임으로 남게 되었다.

서동설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수도인 현 부여 남쪽 연못가에 살던 과부가 용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생활이 어려워 과부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마를 캐서 팔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마동(薯童)이라 불렀다. 마동은 가난했으나 재능과 도량이 남달랐다. 마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서울로 갔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오늘날 서동요로 알려진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했다.

“선화 공주니믄(선화공주님은)
남 그즈지 얼어 두고(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둥방을(맛둥 서방을)
바매 몰 안고 가다.(밤에 몰래 안고 간다.)”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乙 / 夜矣夘乙抱遣去如 )

이로 인해 선화공주는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마동은 유배길의 선화공주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산 뒤 정을 통하고 백제로 데리고 온다. 선화공주로부터 황금의 중요성을 알게 된 마동은 마를 캐면서 보아둔 많은 황금을 현재 익산 미륵산인 용화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 부탁하여 선화공주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에게 보낸다. 이로 인해 진평왕으로부터 부마로 인정받게 되고 백제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서동설화에서 서동왕자가 보여준 슬기(wit)와 도전정신과 열정은 처지가 불우했지만 결코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 도저히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적국의 아름다운 공주를 얻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과감히 실행한 점,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인 서동요를 지어 부르게 한 점, 황금을 아끼지 않고 전량을 처가 왕실로 보내 마음을 산 점,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유능한 지명법사를 멘토로 삼은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늘 날 백제의 후예들이 이러한 서동왕자의 슬기를 본받는다면 희망과 꿈이 살아나고 변화와 열정이 꿈틀거리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이와 같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을 거둔 영웅설화의 다른 예는 고구려 미천왕설화와 바보온달설화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제15대 미천왕 고을불(高乙弗)은 어릴 때 아버지 고돌고가 큰아버지인 고구려 제14대 봉상왕에 의해 살해되자 위협을 느껴 신분을 속이고 숨어 지냈다. 머슴살이도 하고 소금장수도 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다가 봉상왕의 폭정을 보다 못한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가 봉상왕을 제거하고 소금장수 을불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바보온달설화는 삼국사기 열전 온달조에 기록되어 있다. 온달은 어릴 때 용모가 여위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이 바보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평원왕)은 딸 평강공주가 자주 울자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다.결국 평강공주는 바보온달과 결혼하게 되고 온달은 공주의 도움으로 사냥대회와 외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신임을 얻고 대형의 벼슬에 오르게 된다.

애석하게도 온달은 신라와의 싸움에서 현재 충북 단양군 영춘면 부근의 을아단현(아차산성)에서 화살을 맞아 사망한다. 오늘날 이곳은 온달동굴과 온달산성, 온달관 등 온달(溫達)을 중심 콘텐츠로 하여 온달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최 규 학
부여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