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칼럼] 나쁜 피를 빼내야한다구요?
2012-06-14 임현택
혈액은 심장의 박동에 따라 우리 몸 전체를 순환한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혈액은 그 힘을 받아 우리 몸에 산소 및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각 장기 또는 말초 부위를 향해 간다. 심장은 1분에 약 5L의 혈액을 내보내는데, 체내를 순환하는 총 혈액량이 약 5L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혈액이 우리 몸을 한 바퀴 도는 데는 불과 1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만약 운동 등으로 체내 혈액 순환이 빨라진 상태라면 이 시간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혈액은 생각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지금도 쉬지 않고 살아있는 우리 몸 전체를 돌고 있다. 물론 염증이 생긴 부위에서, 또는 혈전 등으로 인해 혈액의 흐름 속도가 느려지는 부위는 있다. 하지만 이런 부위에서도 순환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마치 나쁜 피가 통증 부위 또는 말단 부위에 ‘가만히 고여 있게 되어’ 마치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죽은 피가 된다는 말은 옳지 않다.
또한 혈액 순환은 크게 동맥계와 정맥계로 나눌 수 있다. 심장에서 나와 말초 기관을 향해가는 혈액을 동맥혈이라 하고, 그 반대로 심장으로 돌아오는 혈액을 정맥혈이라 한다. 체순환을 기준으로 동맥혈은 심장에서 나와 신체 각 부위에 산소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산소포화도가 높다. 반면 정맥혈은 각 기관에 산소를 공급해주고 난 후 심장으로 돌아가는 중이기에 산소포화도가 낮다. 만약 말초 부위에서 혈액을 빼내게 되면 체표의 정맥이나 모세혈관을 자극하여 출혈시키게 되므로 ‘정맥혈’이 몸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혈액의 붉은 색은 산소와 결합해 운반해주는 적혈구의 헤모글로빈(Hemoglobin)이라는 혈색소에 의한 것인데, 원래 정맥혈은 동맥혈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소를 적게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검붉게 보인다. 따라서 사혈(瀉血)을 했을 때 검은 피가 나오는 것은 피가 고여서 죽은 피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정맥혈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혈액은 혈관 밖으로 나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혈을 위한 응고 과정으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피를 빼낼 경우 혈액이 응고되면서 순식간에 점도가 높은, 끈적거리는 형태로 바뀌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색도 좀 더 진해지게 된다. 애초에 끈적거리는 형태로 몸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의학 시술 중 부항 요법은 습부항 요법과 건부항 요법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중 습부항 요법이 사혈 후 부항의 음압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피를 빼내는 방법이다. 이는 국소 부위의 혈액을 체외로 배출시키는 방법을 통해 해당 부위에 강한 자극을 줌과 동시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고 진통 효과 및 염증을 가라앉히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즉 습부항 요법은 전신의 혈액 순환 증진과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국소적인 부위에 일정량의 혈액을 적절히 빼주는 것이지, 단순히 죽어있는 혈액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아니다.
최근 의료인이 아닌 무면허 시술자에게 마치 이 사혈(瀉血) 요법이 모든 통증에 효과적이라거나, 체질을 개선시킨다는 명목으로 시술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신경통, 근육통을 막론하고 무작정 아픈 곳의 피를 과량으로 빼내거나, 제대로 소독된 기구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시술함으로써 국소 부위의 감염이나 염증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빈혈이나 탈진을 유발하는 부작용 사례도 있다고 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사혈(瀉血) 및 부항을 통해 빼낸 피는 체내 순환을 돕기 위해 혈류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부분이나 경혈에서 빼내는 정맥혈과 체액의 일부이지, 몸 안에서 썩어 검게 되거나 끈적해진 나쁜 피가 아니다. 따라서 고여 있는 죽은 피를 무조건 빨리 빼주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사혈이나 습부항 요법은 적절한 방법으로 위생적인 시술을 받을 때에만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한의사의 전문적 시술 하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받는 것이 좋다.
임 현 택 충화보건지소 한방공중보건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