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단상] 11월 3일은 학생의날

2012-11-01     김대열
우리나라에는 어버이날, 스승의 날, 어린이날, 학생의 날 등이 있다. 어버이날은 1910년경 미국의 한 여성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하여 흰 카네이션을 가지고 와서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에서 유래했다. 1956년에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했다가 1973년에 어버이날로 이름을 바꿨다.

스승의 날은 1958년 5월 8일에 이웃 강경에서 청소년적십자단원들이 스승을 찾았던 것이 계기가 되었고, 1965년에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였다.

어린이날은 방정환 선생이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를 소중하게 생각하자는 뜻으로 1923년 5월 1일 제창되었다가 1946년에 5월 5일로 바꿨고, 1972년부터 법정공휴일로 정해졌다.

그러면 학생의 날은 어떻게 정해졌을까? 1953년 처음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였는데 1974년 유신 때 학생의 날을 폐지하였고, 1980년대 중반에 신군부에 의해 다시 학생의 날이 부활되었다. 그러면 왜 학생의 날은 11월 3일로 제정되었고, 왜 폐지되었다가 부활되었는가? 그것은 1929년 광주 학생 의거와 관련이 있다.

1910년에 강제로 한일 합방이 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독립을 위해 싸웠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의 무단통치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짚밟혔지만 대략 10년 후인 1919년에 전 국토에서 독립만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3.1운동을 진압하면서 총칼로 다스렸던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껴 문단통치로 통치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문단통치는 그동안 표현을 억눌렀던 것에서 표현을 허용하는 것으로 바꾼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창조, 개벽, 폐허, 백조, 금성, 영대, 조선문단, 해외문학, 삼천리 등 많은 잡지 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억눌려 말을 못했던 사람들이 글을 통해서 할 말을 해도 적당히 용서해주는 식으로 통치를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식민지가 점점 고착화되었고, 무장독립투쟁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독립의 열망이 점점 사라져 갔다.

3.1운동이 있은 지 10년 후 1929년 10월 30일 오후 광주를 출발한 통학기차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교 3학년 학생인 일본인 후쿠다가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의 머리를 만지고 당기면서 희롱하는 것을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목격하게 된다. 박준채가 친구들과 함께 후쿠다를 두들겨 패면서 패싸움 발생했다.

사태가 점점 커지자 경찰이 개입하게 되고 패싸움하던 학생들 모두가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다음날 일본학생들은 곧바로 석방되고 조선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광주의 조선학생들은 11월 3일에 광주역에 모여 “조선학생들을 석방하라” 시위를 하게 되었다.

경찰 측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학생 중에 “조선이 독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설사 이번에 풀어주더라도 조선이 독립되지 않은 이상 언제나 반복적으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독립을 외치자.” 하면서 대한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시위가 “조선학생 석방”에서 “대한독립 만세”로 바뀌었다. 제2의 3.1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은 다시 총 칼로 진압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젊은 학생들이 독립군으로 자원하여 독립운동이 다시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비록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여 독립을 얻어 냈지만 독립군의 활동은 우리 역사에 중요한 민족정신으로 남아있다.

학생의 날을 제정하기 위해 학생들이 나라에 기여한 날을 찾아보니 광주학생의거였다. 그래서 학생의 날을 11월 3일로 정한 것이다. 헌데 1950년대부터 학생의 날을 맞이한 학생들은 케이크에 불을 끄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정권을 잡은 이승만은 독립 운동가들을 다시 탄압하고 친일파들을 그대로 등용하고 빨갱이를 소탕한다면서 자기의 반대세력들을 죽이는 등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이승만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학생의 날에 다시 “이승만은 물러나라”고 시위했다. 결국 이승만은 4.19학생의거에 의해 물러나고 말았다. 이 후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유신헌법을 발표하고 자기의 부정에 대해 시비 걸만한 학생들을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의 날”도 없애버렸던 것이다. 학생의 날이라고 학급 학생들에게 떡을 해서 먹이던 선생님이 구속되고 학생의 날이라고 다과를 베풀던 선생님도 구속되었다.

이렇게 학생의 날이 잊혀질쯤 용기 있는 선생님들이 구속, 파면, 해임을 당하면서도 교육의 3주체인 학생에게 학생의 날을 돌려주자는 의견을 계속해서 1980년대 신군부정권에게 요구했고 결굴 학생의 날이 부활하게 되었다. 학생의 날을 생각하면 역사와 민족 앞에 눈물이 난다. 그런데 이미 학생의 날을 기억에서 지워버린 선생님들은 이 날을 그냥 지나칠 수 있다.

이번 11월 3일 학생의 날부터는 학생에게 떡을 해 주자. 선생님이 못하면 학부모가 떡을 해 주자. 학생은 교육의 주체이니 학생에게 당당하라고 말해 주자. 그리고 어른들은 학생들의 말에 귀기울이자. 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게 하자. 그리고 이 날만큼은 틀린 말을 해도, 어리냥을 부려도 용서해 주자.


김 대 열
부여여자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