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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계백장군 동상, 이대로 좋은가 하
특별기획- 계백장군 동상, 이대로 좋은가 하
  • 소종섭
  • 승인 2013.08.07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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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 동상 다시 만들자!
계백장군은 부여의 상징이다. 그는 부여 충화 사람이다. 장군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충신의 사표이다. 어두운 밤에도 별처럼 빛나는 정신의 소유자이다. 역사상 수많은 영웅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충절과 지략, 용맹에 빛나는 장군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부여는 지금 계백장군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된다. 관광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다. 필자가 늘 강조했듯이 그것은 정신의 문제이고 역사의 문제이다. 부여야말로 핏줄로 보나 정신으로 보나 장군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논산 연무읍 구자곡초등학교에 있는 계백장군 최초 동상을 부여로 모셔오는 일은 간단치 않다. 현재로서는 △구자곡초등학교 동문들의 강한 반대 △부여가 돌려달라고 주장할 근거가 약하다는 점 △구자곡초등학교와 논산시 측에서 등록문화재로 추진하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어렵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 판단하기는 이른 만큼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1966년 부여에 세워졌던 최초 계백장군 동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번 호에서는 ‘계백프로젝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부여는 ‘계백’ 브랜드의 원저작권을 갖고 있는 곳이다. 장군이 태어난 곳이 부여 ‘충화면 표뜸마을’이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 수련했던 곳 등이 있는 곳은 전국에 부여가 유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좋은 자원을 갖고도 그것을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하다. 장군은 적군이었던 신라군으로부터도 존경 받았던 호국의 상징이요, 충절의 대표 인물이 아니었던가.

부여에는 계백장군과 관련한 문화유산이 여럿 있다. 우선 부여군청 앞에는 계백장군 동상이 있다. 1979년 김세중 서울대 미대 교수가 만든 작품이다. 부소산에는 삼충사가 있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장군의 초상이 정부로부터 유일하게 공인된 장군의 모습이다. 부여 출신 오태학 전 중앙대 부총장이 그렸다.

궁남지 옆에는 2002년 만든 5천 결사대 출정상이 있다. 백제문화제 기간에 이곳에서 5천 결사대의 넋을 기리는 충혼제를 올린다. 동남리에는 의열사가 있다. 성충 흥수 계백 이존오 정택뢰 황일호 등 백제, 고려, 조선을 아우르는 부여의 충신들을 모신 곳이다. 백제 충신들을 기리는 사우로는 부여에서 최초로 1575년(선조 8년)에 세워졌다.

충화에는 장군이 태어난 표뜸마을, 계백장군 등 팔충신을 모신 팔충사, 장군이 무예를 닦았다는 무쇠점 마을, 호랑이와 함께 책을 읽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천등산, 장군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장군바위 등 계백장군과 관련한 숱한 문화유산이 있다.

부여군청 로터리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 우선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동상 자체가 한가롭다. 처자식을 베고 결전장으로 나가는 장수의 모습이 떠올려지지 않는다. 용맹, 기상을 느낄 수 없다. 공공장소에 세워진 상징화 된 장군들의 동상 가운데 이처럼 힘이 없어 보이는 동상은 없다.

‘계백 브랜드’ 저작권자는 부여, 적극 살려야
부여 계백장군 동상처럼 기백 없는 기마상 없어
충화에 생가 만드는 등 ‘계백프로젝트’ 추진해야


기마상을 중심으로 다른 장군들의 동상을 살펴보았다. 부여에 우리나라 최초의 기마상으로 계백장군 동상이 세워진 3년 뒤인 1969년, 서울에 김유신 장군상이 기마상으로 세워진다. 1969년 3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총재 김종필)가 3월 2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쌍용의 창업자인 김성곤 씨의 기금 헌납으로 세워지는 김유신 장군의 조상건립기공식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는 1969년 9월 23일자에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총재 장태화)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세운 김유신 장군 동상 제막식이 23일 상오 10시 군악대의 주악으로 태평로 녹지대에서 베풀어졌다고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3부 요인 등 각계 인사가 참석했고 제막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헌화했다고 나와 있다. 대통령과 3부 요인이 참석했을 정도로 김유신 장군의 동상 제막은 정권 차원의 상징 행사였다.

서울시청 앞에 세워졌던 김유신 장군 기마상은 1972년 3월 28일 철거되어 남산으로 옮겨진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태평로에 세워졌던 김유신 장군 동상이 28일 새벽 철거되었다. 이 동상은 지하철이 지나가게 되어 남산야외극장 앞 어린이공원으로 옮기기 위해 철거된 것이다. 시는 7백만원 예산을 들여 5월말까지 남산 야외극장 앞에 100평의 녹지대를 만들고 김유신 장군 동상을 옮겨 세울 예정이다.’

(사진①) 김유신 장군 동상(남산야외극장 앞) 21c부여신문

사진①에서 보듯이 역동적인 말의 움직임과 칼을 정면으로 쭉 뻗은 공세적 스타일, 말꼬리의 동적인 흐름 등이 어우러져 손색이 없다. 현재 부여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과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이 김유신 장군 동상은 조각가 김경승 씨가 만들었다. 친일조각가로 알려졌다. 해방 후 이화여대, 홍익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현재 국회 중앙홀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등 숱한 동상을 제작했다.

(사진 ②) 김유신 장군 동상(경주 황성공원) 21c부여신문

경주에도 김유신 장군상(사진②)이 있다. 경주 황성공원 독산 꼭대기에 있다. 김유신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다. 칼을 뽑아 든 김유신이 향하는 방향은 북쪽이다. 이 동상은 경상북도가 1977년 9월 1일 준공한 것이다. 동상 건립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4월 1일에 기존 김유신 동상을 더 웅장하게 만들고 방향을 동향에서 북향으로 하라고 지시하여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왜 박대통령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북쪽으로 달리도록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은상 선생이 쓴 비명(碑銘)에 “화랑정신을 받들어 국토통일의 맹세를 짓다”라는 대목이 있다. 김유신의 삼국통일 정신을 대한민국 주도의 남북통일 정신으로 이어받자는 뜻을 담아 세운 것이다. 크고 힘차다. 이 동상은 경주의 조각가 고 김만술 선생이 만들었다. 밤이 되면 김유신의 청동 기마상은 조명을 받아 언덕 위에서 빛난다. 어릴 때부터 이를 보고 자란 경주인들은 자부심을 느낀다.

(사진 ③) 강감찬 장군 동상(서울 낙성대 공원) 21c부여신문

서울 낙성대 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사진③)은 대석 오른쪽을 더 높게 해 상승감을 극대화 하며 전진하는 말의 형상을 잘 표현했다. 칼을 든 장군의 기상도 살아 있다.

(사진 ④) 최윤덕 장군 동상(경남 창원 중앙로) 21c부여신문

경남 창원 중앙로에는 조선 세종 때 육진을 개척한 최윤덕 장군의 기마상(사진④)이 있다. 말 위에서 장군이 활을 쏘는 장면을 형상화 해 용맹한 느낌을 살렸다.

(사진 ⑤) 태조 이성계 동상(의정부 중앙로) 21c부여신문

의정부 중앙로에 있는 태조 이성계 기마상(사진⑤)도 형상이 비슷하다.

(사진 ⑥) 고경명 의병장 동상(전남 광주월드컵경기장 옆 공원) 21c부여신문

조선 선조 때 의병장인 고경명 장군의 동상(사진⑥)은 전남 광주월드컵경기장 옆 공원에 있다. 공격 명령을 내리는 장군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이들 기마상과 현재 부여에 있는 계백장군상을 비교해보라. 느낌이 어떤가. 부여의 계백장군 동상은 동상 자체의 문제 외에 다른 문제도 있다. 첫째, 동상 주변에 심은 나무가 너무 커서 동상이 왜소해 보인다. 나무들을 옮기든가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차량들이 계속 다니다보니 일반인들이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셋째, 상징성을 극대화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주간에는 명령을 내리는 소리 같은 것, 야간에는 특수 조명효과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부여군청 로타리에 세워져 있는 현재의 계백장군 동상. 21c부여신문

이에 더해 부여로 수도를 옮긴 성왕의 동상과 계백장군 동상을 잇는 거리를 특화해 명품거리로 만드는 방안도 고려해 볼만하다. 성왕과 계백장군은 백제적인 관점에서 부여로서는 처음과 끝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야간에는 두 동상을 연결하는 조명을 까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현재에도 이어지는 역사적인 연결성을 상징할 수 있다. 더불어 충화면 계백장군 유적지를 이와 연계해 개발할 필요가 있다. 먼저 장군의 생가터를 찾아 복원하는 작업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최근 가본 경기도 양주시의 경우도 방랑시인 김삿갓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에 생가를 복원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계백장군이 태어난 표뜸마을을 조사해 생가터를 추정하고 복원함과 동시에 천등산 등 주변 계백장군 흔적을 찾아 순례 코스로 묶는다면 충분히 멋진 테마가 된다. 계백장군과 관련한 각종 스토리도 풍부하지 않은가. 또 서동요 세트장에 청소년수련원 수련 기능이 이전된다면 ‘계백장군 수련원’ 식으로 청소년들의 수련과 계백장군이라는 테마를 묶어 호국 정신을 새기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장소로 브랜드화 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앞서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지금의 계백장군 동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새로운 계백장군 동상을 만들어 세우는 방안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지금처럼 일부 주변 정비를 하는 정도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여인들이 힘을 모아 기상이 살아 있는 용맹한 장군상을 만들어 세우는 과정에서 부여인들 스스로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 또한 그런 기백이 있는 장군상을 보며 자라난 후배들은 나라를 이끄는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계백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소종섭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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