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21:55 (수)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⑫(마지막회)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⑫(마지막회)
  • 소종섭
  • 승인 2014.10.21 16: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뜻은 웅대했으나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무량사에서 마침표를 찍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였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에 감사드린다.

김시습 선생이 강원도 양양에 머물 때 거처했던 양양군 현북면 법수치리 검달동 집터를 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 회원들이 답사했다. 21c부여신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불기(不羈)의 삶 추구

율곡 이이가 선조의 명을 받아 쓴 <김시습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이 47세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글을 써서 조부와 부친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렇다. 이 해에 김시습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돌연 환속했다. 당시 김시습이 지은 제문의 대강은 이렇다.

‘~<효경> 오형(五刑)에 보면 죄 되는 것 삼천 가지를 나열했는데 그 가운데 불효가 가장 컸습니다. 대체로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누가 양육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어리석고 못난 소자가 가문을 이어야 할 텐데, 이단에 깊이 빠졌다가 말로에 가까스로 뉘우쳤습니다. ~청빈한 생활임을 참작해서 간략하면서도 깨끗이 차리도록 힘썼고, 젯밥을 올리는 것도 정성으로 하였습니다. ~.’

김시습이 머리를 기르고 환속했을 때 당대의 문장가 서거정은 “입산이건 출산이건 자유자재로 했으니, 유교에건 불교에건 불가함이 없다”며 김시습은 불교를 배척한 유자라고 했다. 환속한 김시습은 안씨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 또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안씨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고 2년 뒤에 홀로 관동으로 떠난 것을 볼 때 김시습은 안씨와 결혼한 지 얼마 안 가 사별했던 듯하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남씨와 마찬가지로 김시습은 가정 생활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었던 것 같다.

김시습은 분노가 일어나면 여염으로 나다녔다. 하루는 저잣거리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을 만났다.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저놈은 그만 쉬어야 해!”라고 외쳤다. 정창손은 자리를 피했다. 정창손은 사위 김질을 데리고 사육신의 의거 기도를 세조에게 고해 출세길에 오른 인물이다.

김시습에게 모욕을 당한 관원은 정창손 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김시습과 가까운 서거정에게 “너무 무례합니다. 한 번 혼내주어야겠어요”라며 김시습에게 보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한 서거정의 답변이 재밌다.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그만두게. 만일 지금 이 사람(김시습)에게 죄를 준다면 백세 후 당신들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오.”

이 즈음 김시습은 머리맡에 ‘북명(北銘)’이라는 글을 써놓고 생활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쪽박 물과 찬밥을 먹을지언정 자리 차지하곤 공짜밥 먹지 말며
한 그릇 밥 받으면 그에 걸맞는 힘을 써서 의리에 맞아야 하리.
하루 닥칠 근심보다는 종신 근심할 일 근심하고
파리함을 괘념하지 말고 뜻 바꾸지 않는 즐거움을 즐겨야 하리.
염치 지키는 선비 풍모를 숭상하고
간특한 세속의 작태를 미워하라.
뭇사람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뭇사람 깔봄에 노여워 말고
기꺼이 천리를 따르면
유연히 깨치게 되리.
(이하 중략)

물이 맑기로 유명한 법수치 계곡은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들이 계곡을 메운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49세 되던 1483년(성종 14) 봄, 다시 관동으로 갔다. 다시 승려의 복색을 했다. 그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제자인 선행과 함께 관동으로 가는 김시습은 각종 책 말고는 별다른 짐이 없었다. 중년 이후 김시습과 가장 절친했던 남효온과 홍유손이 동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한 잔 술을 기울이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두 사람은 이것이 김시습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준 다음과 같은 송별시가 전한다.

그대를 보내려고 병든 몸 일으켜
흥인문(동대문) 밖에서 여름 먼지를 들썼다오.
오늘 저녁 이별하면 하늘가에 계시리
메밀꽃 앞에서 눈물을 삼킬 그대

김시습은 남효온에게 답시를 주었다.

옛사람도 지금 사람과 비슷하고
지금 사람도 뒷사람과 같으리.
인간 세상은 흐르는 물과 같아
유유히 흘러 가을 가고 봄이 오네.
오늘은 소나무 아래서 술을 나누지만
내일 아침에는 깊은 산 속을 향하려오.
깊은 산 푸른 봉우리 속에서
그대를 그리는 정 실타래 같으리.

곡운 일대(현재의 화천군 사내면)를 거쳐 춘천으로 가 춘천 인근 우두사와 청평사, 소양정에 들르며 한동안 생활한 김시습이 거처를 정한 곳은 설악산 기슭인 강원도 양양이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이때 김시습이 소양정에 올라 읊은 시 ‘소양정’을 김시습이 지은 시 가운데 최고라고 평했다.

새 나는 바깥에 하늘은 다하건만
근심결에 한은 하염없구나.
산은 대부분 북쪽에서 굽어 오고
강은 절로 서쪽을 향하여 흐른다.
기러기 내려앉는 모래펄은 아스라이 깔렸고
배 돌아오는 옛 기슭은 그윽하여라.
어느 때에야 세상 그물 벗어나
흥 타고 여기서 다시 놀랴.

김시습이 양양에서 머물던 곳은 현재의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법수치리 검달동이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검달동은)부의 남쪽 80리에 있다. 김시습이 집터를 가려서 거처한 곳이다. 동구에는 영지가 있는데, 전하는 말에 오세동자가 채취하던 것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검달동은 여름이면 피서 인파가 엄청 몰려드는 법수치 계곡 거의 끝자락에 있다. 펜션들이 끝없이 이어진 계곡이었다. 지난 9월 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현장 답사를 가보니 법수치 계곡은 시작 지점에서 끝까지 버스로 10분 이상을 달려야 할 정도로 계곡이 깊었고 물이 맑았다. 그 끝부분에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라고 알려진 터가 있었다.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자리였다.

김시습 선생은 무량사로 오기 전 북한산 중흥사에 들러 남효온 등과 5일을 보냈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왜 이 깊은 산 속을 거처로 정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부여 무량사나 경주 금오산 용장사터, 수락산 폭천정사터 등 김시습이 머물던 곳의 공통점은 주변에 물이 흐른다는 점이다. 회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선생의 자취를 좇았다.

1487년 양양부사 유자한이 김시습을 찾아와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유자한은 본관이 진주인데 1459년 평양별시문과 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다. 사헌부 지평, 예문관 응교 등을 거쳐 1486년 양양부사로 부임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김시습에게 환속하여 가정을 이루고 과거를 봐서 벼슬길에 나아가라고 권했다.

김시습은 “선비는 세상과 모순되면 은퇴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이 그 본분이거늘, 어찌 남의 비웃음과 비방을 받아가며 억지로 인간 세상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옛 사람이 이르기를 ‘늙을수록 더욱 지기를 굳건히 해야 하고, 궁할수록 더욱 견실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바로 제게 해당될 것입니다”라며 사양했다.

유자한은 안주와 술, 쌀을 보냈다. 김시습은 감사의 나타내고 찬송시와 함께 편지를 보냈다. 유자한은 또 여자 종을 김시습에게 보냈으나 김시습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이 시절 김시습은 가을날 잔디에서 노래하는 귀뚜라미, 그늘에서 나와 굽혔다 폈다 하는 하루살이에 자신을 비유하며 세상에 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곤 했다.

외로움이 깊어졌기 때문일까. 김시습은 문득 자신과 마음을 나눈 남효온이 그리웠다. 이 시기에 지은 시에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산 속에 나무 그늘 울창하여
인적 없이 적막한 때
멀리 바라보며 높이 나는 새를 슬퍼하고
상심하여 먼 봉우리를 근심한다.
남은 일생이 하잘 것 없어
뜬세상에 추한 몰골 한스러워라.
어느 날에야 장안으로 돌아가
이 마음을 백공(남효온)에게 말하랴.

1491년 봄, 김시습은 서울 북한산 중흥사로 왔다. 젊은 날 세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터뜨리고 길을 떠났던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김시습은 남효온과 김일손을 만나 백운대, 도봉산 등에 오르며 닷새를 함께 보냈다. 당시 김시습은 57세, 남효온은 38세, 김일손은 22세였다. 세 사람은 나이 차를 떠나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 마음으로 벗을 맺은 친구로서 지냈다. 김시습은 5일 뒤 양화도에서 배를 타고 관동으로 돌아갔다.

김시습 선생이 생을 마친 부여 무량사는 승탑과 자화상 등 선생의 흔적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21c부여신문

관동으로 간 김시습은 얼마 뒤 부여 무량사를 찾았다. 김시습은 왜 중흥사에서 바로 무량사로 가지 않고 관동을 거친 것일까. 김시습은 왜 관동에서 곧바로 무량사를 향해 간 것일까. 미스터리다. 1491년 봄, 김시습을 만나기에 직전 남효온이 부여를 찾았다는 사실이 한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중흥사에서 만난 남효온이 부여 이야기를 김시습에게 했을 가능성이 있고, 무량사에서 법화경을 간행하면서 이곳을 찾은 남효온에게 김시습을 만나면 무량사로 와 달라는 이야기를 전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 흐름으로 보면 충분히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한동안 머물던 관동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들렀다가 바로 무량사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김시습은 1493년 봄에 무량사에서 <법화경> 발문을 썼다. 판각은 전 해에 했다. <법화경> 발문에 김시습은 ‘췌세옹 김열경’이라고 서명했다. 법호인 ‘설잠’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불교에 의탁했으면서도 불교를 초월한, 불교에 얽매이지 않는, 불기(不羈)의 삶을 지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홍유손은 제문에서 “명산과 대천에는 오직 공의 발자취만 두루 남았으며,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김시습, 그는 실로 역사에 빛나는 별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뼈를 묻은 곳이 부여이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길 위의 노래> 정길수 편역
<금오신화> 김경미 옮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