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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네번째
[탐사기획]『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네번째
  • 소종섭
  • 승인 2011.10.27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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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0월 3일. 햇살은 따가웠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서늘했다. 바람이 그친 틈을 타고 살갗을 파고들던 햇살은 오후가 되자 더 기세가 등등해졌다. 어느새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전에 부산서원 유사들의 회의에 참석한 뒤 함께 한 점심이 절로 소화가 되는 느낌이었다.
양복 윗옷을 벗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나무 계단은 부서질대로 부서져 있었다. 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좁은 산길을 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팔라서인지 금방 숨이 턱에 찼다. 약간 힘들다는 느낌이 들 때쯤 내리막이 나타났다. 철로 만든 계단이었다. 곳곳에 녹이 슬고 철 계단 틈으로 풀들이 올라와 있었지만 아직 튼튼했다. 그 철 계단의 끝에 대재각(大哉閣)이 있었다. 규암면 진변리 부산(浮山)에 있는 바로 그 대재각이다.

27~28년 전 부여고등학교에 다니며 불교학생회 활동을 할 때 진변리에 사는 친구 이종우를 따라 대재각에 가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다. 그때는 길이 나 있지 않아 백마강변 바위를 타고 혹시 백마강에 떨어지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기어서 대재각에 올랐었다.
지금은 제법 길도 났고 철 계단도 설치해 다니기가 한결 쉬워졌다. 누구나 와볼 수 있다. 밤이면 조명도 켠다고 하니 얼마나 아름다울까, 언제 꼭 한 번 밤에 와봐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주 와보지 못했어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필자는 외산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부모님이 그 곳에 살고 계시다)을 찾아뵈러 갈 때마다 한 번씩 대재각을 쳐다보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곳에는 가슴을 울리는, 잊을 수 없는 여덟 글자가 있기 때문이다.

대재각(大哉閣) 바위에 새겨져 있는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 글씨. 우암 송시열이 썼다. 21c 부여신문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날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멀어 마음에 지극한 아픔이 있다)’ 북벌의 원대한 꿈을 꾸었던 효종 임금의 아픈 마음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글귀가 있었던가. 이래서 대재각은 부여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적인 장소이다.
드넓은 대륙 진출의 꿈을 일깨워주는 곳이자 외세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자적인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교훈의 장이다. 천추만대에 잊어서는 안 되는, 북방 고토에 대한 수복 의지를 다지는 강한 기상을 심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부여인들이 한 번 쯤은 꼭 가보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1585~1657) 선생을 생각한다. 선조 18년에 나 효종 8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의 문신. 세종대왕의 열셋째 아들인 밀성군의 5대손인 목사 수록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봉암(鳳巖), 본관은 전주이다. 광해군 때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거듭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모시는 데 역할을 했다. 좌승지·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가까이서 모셨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 형조판서를 지냈다. 1642년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에 끌려갔다가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해 우의정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이 되었다. 청나라가 영의정이 된 것이 부당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사신을 보내와 영의정에서 파직됐다.

그가 부여에 낙향한 것은 45세 때이다. 외가인 윤씨 쪽에서 땅을 얻은 데 따른 것이다.
대재각에 새겨져 있는 ‘至痛在心 日暮途遠’은 이경여 선생이 73세 때 죽기 3개월 전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 대해 효종이 내린 답변의 핵심 내용이다. 당시 이경여는 답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대재(大哉)라! 왕언(王言)이여…”라고 했다고 알려진다.

그 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왕의 뜻을 이어 받아 2차로 북벌 계획을 구상할 때(현종 때) ‘至痛在心 日暮途遠’ 여덟 자를 써 자신의 제자이자 이경여 선생의 셋째 아들인 이민서에게 준 것을 이경여 선생의 손자인 이이명이 1702년 할아버지 집 뒤의 자연석에 새긴 것이다.
‘백강공신도비(白江公神道碑)’에는 송시열이 이경여와 효종 사이를 이렇게 평했다고 기록했다. 『임금과 이경여 사이에는 북벌을 꿈꾸는 커다란 계책이 있었다. 때로는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이 지통지원의 마음을 이경여에게만 밝혔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공자의 3천 제자 중 단간목 만이 공자의 깊은 뜻을 헤아린 것과 같다. 그만큼 임금께서는 이경여를 신뢰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경여가 효종 임금에게 올린 상소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일부분만 살펴보자.
『나라의 일을 잘하고 못한 점에 대해 백성들이 느낌을 말하는 것도 정치이고 현실입니다. 그런데 조정이 일을 하고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백성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데 성명께서는 하늘이 내게 경고한 것은 왜 그런 것이며 내가 하늘을 받드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반드시 살펴서 어떤 일이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강구하여 체득하고 힘써 행하소서. 전하께서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견을 끊으소서.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백성의 힘을 양성하여 원대한 업을 공고하게 다지소서. 사람이 없다고 하나 인재를 찾아내어 사람을 쓰는 방법은 원래 훌륭한 사람만이 유능한 사람을 알 수 있으며 청(淸)에 대한 설욕은 이미 여건이 적당하지 못하니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신중하고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경여의 집안은 조선의 4대 명문가로 불린다. 학식과 덕망의 상징인 대제학을 3대 연속으로 배출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 한 가문에서 3대 연속으로 대제학을 배출한 곳은 전주 이씨 백강 이경여 가문,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가문, 연안 이씨 월사 이정귀 가문, 대구 서씨 약봉 서성 가문 등 네 집안이다. 이들 집안은 대제학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문형(文衡)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문형은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이끌고 균형을 잡는다는 뜻이다. 문형이라는 칭호는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에 성균관의 대사성이나 지성균관사 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한 세 가지 직위를 모두 겸해야 가능했다. 품계는 판서와 같은 정이품이었지만 그 가문에서는 삼정승 육판서 모두를 배출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임기는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다. 이경여 가문은 이경여, 아들 이민서, 손자 이관명, 증손자 이휘지가 내리 문형을 지냈다.

백강 이경여 집안으로 대표되는 전주 이씨 밀성군파는 세종대왕의 13남인 밀성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밀성군의 후손들은 연산군, 광해군 등의 실정에 분연히 일어나 행동으로 항거했다. 배청파로서 북벌 운동을 주도했고, 노론을 이끄는 사상가로 서구 문물에 관심을 보인 실학 사상에 관심을 보였다.
우암 송시열은 <지천유사>에서 이경여 선생이 설득의 달인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척화파였지만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을 화해시킨 사람이 이경여라는 것이다.
김상헌, 최명길, 이경여는 한때 모두 심양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이경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자 기쁜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고 <지천유사>에 나와 있다.
『두 어른의 행동은 각각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하늘같은 절개와 나라를 위한 큰 공적이다』
김상헌은 이경여보다 14살이 많았고, 최명길은 이경여보다 한 살이 적었다. 이경여는 심양에 있을 때 특히 가까운 김상헌과 매일 대화를 나눌 정도였고 최명길과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상헌은 이경여가 심양에 끌려오자 <청음집>에 이렇게 심정을 적었다.
『자나 깨나 서로 그리워하면서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 만나게 해 여생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기를 바랐다. 비록 그 지극한 소원은 이루지 못했으나 또한 어찌 적국의 옥에서 만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하늘의 뜻은 이상하기도 하다. 짤막한 시를 지어 나의 뜻을 부치는 바이다. 인생살이 한백년을 산다 하지만 … (중략) … 나와 뜻을 같이하는 선비 있기에 시를 지어 거듭 거듭 권면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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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여는 인품이 빼어나고 외유내강형이었다. 올바르게 몸과 마음을 닦기에 진력하였고 크고 작은 일을 당해서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처신했다. 독서를 좋아하여 항상 책을 갖고 다녔고 병중에도 절대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대쪽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포용하려고 했다. 현실 정치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동료들은 마음이 다른 사람과도 더불어 살려고 하는 그의 자세를 단점으로 보기도 했다.
그가 73세로 죽자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갔다. 그러나 임금은 성스러웠고 신하는 어질었다. 이것은 역사에 드문 일이다”

그는 저서로 <백강집>을 남겼다. 경기도 포천에 묘소가 있고 부여 부산서원, 전남 진도의 봉암사, 전라북도 고창군 동산서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백강 이경여 가문은 대를 이어 청빈했고 올곧았다. 아들 이민서가 죽자 사관이 다음과 같이 기록한 내용이 실록에 남아 있다.
“이민서는 故 이경여의 아들로 성품이 강직하고 방정했다. 조정에서 30여 년을 근무하면서 여러 사건을 겪었으나 지조가 한결같았다. 직위가 판서에 문형이었으나 집안은 가난한 선비와 다름이 없었다”
이경여의 다섯 째 아들인 이민철은 과학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경여가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를 변호하다 진도에 유배될 때 따라가 아버지의 지도로 천의기(天儀器)를 조립하고, 1650년(효종 1) 아버지가 풀려날 때까지 과학기술을 배웠다. 1664년(현종 5) 왕명으로 측우기와 혼천의를 제작해 혼천의 속에 회전 지구의(地球儀)를 넣어 지동설(地動說)을 입증했다. 1669년(현종 10) 감찰(監察)·교리(校理) 등을 거쳐 1678년(숙종 4)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고 그해 병으로 물러났다. 대나무로 만든 물시계도 발명했다. 규암면 오수리에 묘소가 있다.
규암면 진변리에 있는 부산서원(浮山書院). 이경여 선생이 부여현감을 지낸 김집 선생을 모셨다. 왼쪽 편에는 이경여 선생의 고택 터가 있다 21c 부여신문

부산서원 유사들은 3일 회의를 갖고 향후 운영방안 등을 논의했다. 21c 부여신문
부산서원은 1719년(숙종 45)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부여현감을 지낸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규암면 진변리에 창건했다. 같은 해에 ‘부산(浮山)’이라고 사액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으나 1971년 복원됐다.

현재, 대전에 살고 있는 백강 이경여 선생의 12대손인 이주용 씨에 따르면 부산서원을 지은 목재와 돌 등은 예산 윤봉길 의사의 고택을 뜯어다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11대손인 이항수 씨의 노력에 따라 박정희 前 대통령이 지시해 일사천리로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단청이 바래고 제실에 비가 새는 등 명성에 비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부산서원-대재각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부여의 얼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상징하는 한 장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부산서원에서 대재각으로 가는 길에 안내판 하나 없고, 대재각은 찾는 이 드물어 잡초가 무성하고 가는 길은 허물어져 있었다. 조명을 설치하고 계단을 만들면 무엇 하나. 사람들이 찾아와 그 정신을 배우지 않는다면 한낱 생명력 없는 건물에 불과할 뿐이다.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바로 대재각에 올라올 수 있도록 계단도 만들어져 있었다. 천정대-고란사- 대재각-수북정-반조원리까지 이어지는 백마강 문화답사를 계획하면 멋진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여동매(扶餘冬梅)

이경여 선생이 심양에서 가져온 동매를 심었던 곳. 40여년 전 새로 심은 것이다 21c 부여신문
부산서원 앞에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부여동매(扶餘冬梅)’가 있다. 설 전후 아주 추울 때 꽃이 핀다고 해서 동매이다. 이경여 선생이 심양에서 귀국할 때 흰꽃이 피는 동매 세 그루를 가져와 이 자리에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이 흘러 세 그루 중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남았는데 이마저 1940년쯤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 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해제되었다. 지금 있는 매화나무는 40여년 전 새로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의 동매와 다르고 꽃도 4월에 피지만 그 상징성이 남달라 여전히 ‘부여동매(扶餘冬梅)’라고 부른다.

필자 / 소종섭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이 프로그램(기획 기사)은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취재)한 것입니다.

21c 부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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