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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 궁남지 VS 석성연지
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 궁남지 VS 석성연지
  • e부여신문
  • 승인 2019.06.2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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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vs 석성연지

우리나라 최초의 궁원지(宮苑池)로 신라의 안압지와 일본정원의 원류가 된 ‘궁남지(宮南池)’는 지금 10만평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천만송이 연꽃이 ‘부여서동연꽃축제’의 화려한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이 거창하고 화려한 궁남지에 맞서는 ‘석성연지(石城蓮池)’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석성면 석성리는 1914년까지 석성현과 석성군의 치소였으며 이후 면사무소가 위치했던 석성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면사무소마저 떠난 이곳은 쇠락한 한촌이 되버렸고 그 마을 앞에 있는 조그만 방죽이 바로 ‘석성연지’이다. 그래도 못 가운데 인공섬에 정자를 세우고 다리를 연결한 모습은 영락없는 궁남지의 축소판인데 찾는이 없이 그저 마을 노인 몇명이 더위를 피해 연못가 노거수 밑 그늘에서 쉬고 있을 뿐이다.
이 정도라면 석성연지는 궁남지의 비교상대가 될수없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의 양(量)으로 따져본다면 석성연지도 결코 만만치 않다.궁남지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무왕35년 3월 궁성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방장선산을 모방했다(穿池於宮南...擬方丈仙山)”는 기록으로 축조시기와 위치. 형태등을 알려주고 있지만 아쉽게도 백제패망 이후에는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한다.
특히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지리지와 고지도에는 아예 흔적도 없으며 부여를 다녀간 수많은 시인. 묵객들중 궁남지를 노래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에 와서야 ‘궁남지사계(宮南池四季)’가 ‘부여십경(扶餘十景)’중 제3경에 올라 체면(?)을 세웠다. 미루어 추측컨데 궁남지는 백제 패망시 사비도성과 함께 모든 건조물이 파괴되고 이후 농경지. 늪지 등으로 변했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서야 발굴 조사를 통해 사적지로 지정됐기 때문일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석성연지의 기록을 살펴보자.
연지가 처음 실록에 등장한 것은 조선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의 ‘연지재객관전(蓮池在客館前 연지는 객사남쪽에 있슴)’인데 후에 나온 여지도서(輿地圖書)등의 ‘연지제언(蓮池堤堰)’이란 기록으로 보아 이 연못이 관아의 후원지 이면서 주변의 물을 모으는 집수. 정화기능과 농사용 저수지로 쓰이는 다목적용임을 알수있다. 또한 연지의 규모가 남북 410척. 동서 142척. 둘레 1.006척이며 수심이 3.5척으로 이를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지의 가운데 조성된 인공섬 에는 ‘정우정(淨友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도 여지도서에 ‘재객사전연지변(在客舍前蓮池邊 객사앞 연지주변)’으로 소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정자에는 세 사람의 특별한 우정이 담겨있다. 바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시남 유 계(市南 兪棨)’, 그리고 ‘곡운 김수중(谷雲 金壽增)’이 그 주인공 이다. 김수증은 “가노라 삼각산아”로 유명한 척화대신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젊은시절 석성현감을 지내는데 이때 같은 서인이요, 척화파 인사로 지인관계인 송시열과 유 계가 석성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세 사람이 정우정에 오른 감회를 옮긴글이 송자대전(宋子大全)과 시남집(市南集)에 수록되어 있다.
우암은 설명이 필요없는 조선최고의 성리학자요, 시남 역시 충청오현(忠淸五賢)의 일원으로 문명을 날렸고 김수증도 명문 장동(안동)김씨의 일원으로 석성현감. 성천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화천의 곡운구곡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한 유학자 였다.   
궁남지의 수련(睡蓮)이 ‘품바의 향연(?)’으로 잠못 들던 지난해 7월, 석성연지를 찾았다. 여느 때처럼 찾는 사람 없는 연못을 한바퀴 돌아보고 김수증현감이 휘파람을 불며 가야금을 탓다는 정우정에 올랐다. 비록 고풍스럽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깔끔하게 관리된 정자에는 석성을 다녀간 역대 충청감사 등 문인들이 남긴 제영(題詠)이 해설을 곁들여 걸려있다.
그리고 굵직한 서체의 ‘정우정’ 현판을 보는 순간 다음에는 꼭 친구와 같이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한때는 친했으나 지금은 서먹서먹 해진 친구와 말이다. “왜? 맑을淨(정), 벗友(우)이니까”.  이쯤해서 희망사항 하나. ‘서동연꽃축제’에 보내는 관심의 백분지일 만이라도 석성연지에 나누어 조촐한 ‘석성연지 축제’를 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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