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총살형을 집행할 때 4명의 저격수가 죄수에게 동시에 한 발씩의 총을 쏘게 되는데 세 자루의 총 속에는 실탄을, 한 자루의 총 속엔 공포탄을 장전해 놓고 어떤 총에 공포탄이 들어있는지는 사형집행 저격수도 모르게 한다.
무작위로 총을 집어들고 사형수를 향해 방아쇠를 잡아 당기게 되는데 사형이 집행된 후 저격수들은 저마다 자신이 쏜 총에는 공포탄이 들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 이유가 어찌됐든 강한 스트레스다. 이처럼 한 자루의 총 속에 공포탄을 장전하는 이유는 총살형을 집행하는 저격수의 직업적 스트레스를 덜어주기 위함이다.
어렸을 때 심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성인이 되어서 외상후스트레스질환(PTSD)을 앓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듯이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잘 이겨내면 정신적으로 크게 성숙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정치가, 종교가, 철학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세상살이야말로 좌절, 분노, 절망, 고통을 견뎌야 하는 감인의 세계이니 마음 공부하긴 딱 좋은 곳이다. 고뇌하는 자만이 인생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물질은 넘쳐나도 항상 허덕이는 풍요 속 빈곤은 ‘참나’를 알아 더 많은 물질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게 하는 소욕지족하는 마음을 저절로 내야 하는데 나의 주인 행세를 하는 욕심 많은 가짜 ‘나’를 받들다보니 밖으로만 물질은 구하기 때문에 한사람에게 이 세상 모두를 다 주어도 항상 모자라고 배고파 한다.
배타적인 인종주의, 국가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 나이주의, 가족주의 등 인간이 만든 도덕, 규범, 규칙, 법들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인간이 편의상 만든 유위법(有爲法)이니 그에 따르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닌 꿈과 같은 거짓일 뿐 우주만물의 본질인 무위법(無爲法)과는 거리가 멀다.
19세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성을 떠나 산 속으로 야반도주한 석가모니는 패륜인가? 과연, 은화 30닢 때문에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을까? 무상(無常)하게 끊임없이 변해가는 찰나들이 모여 인생의 긴 여정을 엮어가는 것이니 데카르트의 말대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순간만이 나의 존재함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만이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1초가 지나면 ‘내’가 아닌 나의 변화된 ‘또 다른 내’가 존재할 뿐이다.
찰나들이 모여서 10년이 지나면 과거의 내 모습과는 너무 많이 변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과거의 ‘나’는 더이상 ‘나’가 아니며 지금의 ‘나’가 진정한 ‘나’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이 소중한 것이다.
‘세월 이기는 장사없다’는 말은 온 세상이 끊임없이 변해가는 무상(無常)함을 뜻하는 것이니 이 세상엔 욕심과 애착을 가지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중도는 중앙 값이나 평균 값이 아니다. 정치에선 보수와 개혁의 중간을 중도(中道)라 일컫지만 본래 뜻과는 거리가 멀다. 중도란 끊임없이 변해가는 태생적 근본도 본래의 고유한 성질도 없는 ‘찰나’를 일컫는다. 즉 직선을 이루는 한 점인 것이다. 분명 존재하지만 계속 변해가는 한순간일 뿐이고 그래서 그것을 공(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은 자의 마음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측은지심’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안타깝고 불쌍해 보인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소중한 시간에 마음 공부는 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지와 욕망으로 얼룩진 더러운 영혼들이라고 나무라진 마라! 비속하고 하찮고 어리석고 애절해 보이는 인간들이지만 저마다의 마음 속에 갖추고 있는, 감춰져 있는 자성(自性)은 고귀하고 순수하다.
마음 한 번 돌이키면 그 자성을 밝힐 수 있는데 그것이 그토록 어렵던가?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덕담은 ‘다음 생엔 절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마라’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않으려면...
하루에 5분만이라도 우주만물과 소통하라!
![]() 박 철 신 종양내과 의학박사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부여신문 독자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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