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8 12:02 (월)
부여에 잠든 정승(政丞)-2
부여에 잠든 정승(政丞)-2
  • e부여신문
  • 승인 2021.03.21 2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95

     부여에 잠든 정승(政丞)-2

                   이이명의 묘(임천 옥실)

 조선최대의 환국인 신임사화(辛壬士禍)때 노론 4대신중 1인으로 사사된 ‘소재 이이명’의 묘는 임천 옥실(옥곡리)에 있다. 마을 후편 경사면에 자리잡은 넓은 묘역에는 이이명과 함께 옥사한 아들 이기지(李器之)의 묘가 상하로 나란히 있는데 이이명의 묘는 정미년(1727년)에 공주 죽곡에서 옮겨왔다. 당시 조성한 호석에 ‘소재선생좌의정시충문공이이명지묘(疎齋先生左議政諡忠文公.....之墓)’라 새겨있고 묘비는 이이명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사촌인 좌의정 이관명(李觀命)이 짓고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李宜顯)이 글씨를 썼다. 그러고 보니 ‘정승의 묘비를 정승이 짓고 정승이 쓴’ 형국이 된셈이다. 부여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이명은 이경여의 후손중 가장 걸출한 인물이다. 일찍이 대과에 급제하여 30에 강원감사로 입신한 후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1708년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숙종의 절대적 신임아래 국정을 주도하며 환국의 격랑을 헤쳐 나왔지만 경종 즉위후 노론의 영수로 대리청정등 연잉군(영조)의 후계자 옹립 드라이브를 주도하다 경종과 소론의 반발을 불러와 결국 사촌 이건명. 김창집. 조태채와 함께 사사된다. 이때 목숨을 잃은 사람중엔 백강의 후손만 해도 이이명. 이건명. 이기지. 이희지등 10여인에 달한다.
다음은 영조조에 좌의정을 지낸 ‘학암 조문명(鶴巖 趙文命)’과 우의정을 역임한 아들 ‘손재 조재호(損齋 趙載浩)’의 유택이 있는 외산 반교리로 가본다. JP의 고향으로 유명한 이곳 아미산 산자락에 부자의 묘가 있다. 묘는 춘천(조재호)과 서울(조문명)에 있던것을 근래에 옮겨왔다. 경사진 언덕위에 위치한 부자의 묘에는 조성당시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비와 무인석이 서있다. 조문명의 묘비는 이수를 얹힌 비신전면에 ‘조선수충갈성결기분무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朝鮮輸忠竭誠決幾奮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라고 길게 새겼는데 ’수충갈성결기분무공신‘은 영조때 일어난 이인좌의 난 평정에 기여한 공로로 2등공신에 오른 공신호(功臣號)이다. 역시 세자빈의 사친묘 답게 우람한 규모로 비문은 아우인 조현명이 찬(撰)했다.   
특이한 것은 무인석(武人石)의 배치이다. 요즘 서점가에서 잘나가는 역사유적답사기를 보면 왕(王)이 아닌 사대부의 묘에 무인석을 세우면 불경죄로 처벌 받는다고 쓰여있다. 군사통수권이 임금에만 있으니 무인석은 왕릉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럴싸해 보이나 결론적으로 틀렸다. 정승을 지내고 임금과 사돈까지 맺은 고관의 묘에 세워졌으니 말이다. 조문명 말고도 한명희. 이항령. 박문수와 동생인 조현명등 무인석이 배치된 사대부묘는 다수이다. 조문명은 동생 조현명과 함께 풍양조씨 청교파로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서울과 부여(임천)에 세거해왔다.
그는 문과에 급제,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1730년 우의정에 오른다. 소론집안 이지만 당쟁의 폐해를 절감, 공평무사한 처신으로 영조의 탕평책을 뒷받침한다. 또한 노비종부법 폐지에 앞장서는 등 민생을 챙긴 기록을 남긴다. 또한 그는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빈궁으로 후에 왕후로 추존된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아버지이다.
글씨를 잘썼고 시문에 능했다.
효장세자는 비록 10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양자인 정조가 임금으로 등극하자 진종으로 추존되고 대한제국 선포후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로 격상되니 덩달아 세자빈도 왕후에서 황후로 승격된다. 바꿔 말하면 외산의 조문명묘는 ‘황제의 장인묘’인 셈이다.
조문명의 묘 밑에는 그의 아들 조재호의 묘가 있다.
그는 홍산현감 재임중 문과에 급제, 이고장과 연고가 있다.
승지에 발탁된 이후 경상감사 이조판서를 거쳐 1754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영조의 계비책봉에 반대하여 임천으로 귀양 왔었고 사도세자를 보호하다 경성으로 유배가서 결국 사사된다. 명문가의 자제요, 외척으로 평탄한 장래가 보장됐음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마지막 으로 ‘귀록 조현명(歸鹿 趙顯命)’의 묘가 있는 장암 점상리로 가본다.
이곳은 풍양조씨 부여입향조인 조 신(趙 愼)의 묘가 위치한 풍양조씨 문중묘원이다. 덕림에서 충화 넘어가는 고개마루 길가에 1988년에 세운 조현명의 신도비가 서있고 그 옆 산 정상부에 조현명과 아들 조재득의 묘가 있다. 그의 묘도 보령에서 최근 옮겨졌다. 묘역엔 아들 조재득(趙載得)이 짓고 조재한(趙載翰)이 쓴 커다란 이수를 얹힌 비와 무인석이 서있다. 형 조문명 묘의 무인석보다 규모도 클뿐 아니라 정교한 조각솜씨가 돋보인다. 또한 무인의 늠름하면서도 푸근한 미소가 볼수록 친근감을 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조현명은 형 조문명과 같이 온건세력을 중심으로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주도하여 정파에 관계없이 존경을 받았으며 균역법 개정등 민생안정을 위해 진력한 경세가 였다. 특히 풍양조씨문중의 결속과 위선을 위해 임천을 수차 방문하고 조 신 조익상 조세현. 조문명등 문중인물의 묘비문과 서원배향인사의 유허비문등 다수의 금석문을 남긴다.
조문명(趙文命)은 글을 잘써 ‘문명(文名)’을 날리고 동생 조현명(趙顯命)은 ‘현명(賢明)’한 정승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다.
대표적인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서울 근교에 있던 이들의 묘소가 수백년이 지난 요즈음에 선대의 고향인 부여땅으로 옮겨지는 모습, 역시 수구지심(首丘之心)이다.
                                        (錦江舍廊 이진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