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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갑병 회장, 21세기부여신문에 1천만원 발전기금 쾌척.
천갑병 회장, 21세기부여신문에 1천만원 발전기금 쾌척.
  • e부여신문
  • 승인 2021.03.3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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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 인사들에게 고향을 다시 찾게 만든 인연‘부여신문’. 18년간 어려운 여건 딛고 지역 언론 책임에 부여인으로서 감사. 국가 건설 산업에 헌신, 국내 건설업 면허1호 삼부토건(주)30년 큰 보람. 삼부 설립자 조정구 총회장님과 조남욱 회장님께 감사와 존경. ‘검이불루 화이불치’사비 백제인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검이불루 화이불치’. “백제인의 건축물을 보고 신라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고 백제인의 정신을 표현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미 1500여년 전에 ‘개척정신’을 점철되었다. 지금 우리는 이 시대에 사비 백제인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후배들이 사회의 리더가 되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길 바란다.”면서 평소 자주 인용을 하던 모습이 뼈속까지 부여인으로 자랑스럽다는 천갑병 (전 석성명예면장, 전 삼부건설공업(주)사장,사진)회장. 천갑병 회장은 고향 부여의 유일한 지역 언론인 21세기부여신문에 1천만원의 발전기금을 기탁했다. 천 회장은 “우리 출향인사들에게 고향의 소식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제대로 된 기업하나 없는 농업군인 부여에서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18년간 지역 언론을 이끌고 있는 21세기부여신문에 감사를 전한다”면서 “10여년전 황규산 기자가 부여신문을 인수해 대표이사에 취임할때만 해도 ‘어디 한 1년이나 버틸수 있을까?’하고 큰 걱정을 했는데, 이토록 신문을 잘 만들고,고향을 지키며 버팀목이 되어주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에게 고향을 다시 생각하게 또 다시 찾게 맺어준 인연이 바로 ‘21세기부여신문’이라 생각된다”고 강조하면서,“정치인은 4년,8년 길어야 10년 조금 넘어가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지만, 부여신문은 앞으로 100년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우리 모두가 지켜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천갑병 회장은 누구인가?.....   천 갑병 회장은 부여 석성면 봉정리(봉두정) 출신으로 석성초,부여중, 부여고,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지난 1964년 4월 육군 만기 제대후 경기도청 건설국에 특채, 공직생활을 했다. 이듬해 한발이 극심해 전국의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 지하수 개발 밖에 해결 방법이 없는 상황속에서 양수기의 절대 부족하자, 일본에서 수입,부산항에 도착한 양수기를 각 도별로 할당 운반하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보사국장이 천 회장을 지목 신속한 통관 절차와 열차 배정으로 양수기 800대를 창문도 없는 화물 열차에 싣고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기적을 일궈내 극심한 한발을 해결하며, 큰 공적을 세워 도지사 표창을 2년만에 받는 공직자가 되었다. 이후 1966년 농림부 산하 토지개량조합연합회(농업진흥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국영기업으로는 월급이 가장 높았다.(공무원 월급의 4배규모) 파주 공릉저수지 댐 설치공사, 최전방 미군작전지역 임진강변 민간인 통제 구역 공사감독을 맡았다. 1968년에는 건설부 산하 한국수자원개발공사 창설 요원으로 참여 한강제1교 옆 서빙고 한강 고수부지 매입 택지 조성 설계자로 당시 이익금 10억원으로 소양강 다목적 댐 공사 중 수력발전소 건설을 자체 사업으로 시행, 생산된 전력을 한전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1971년 31세에 최연소 계장으로(평균 43세) 소양강댐 시설계장으로 발령, 동양에서 가장 큰 댐(높이 123m)을 건설했다. 1973년 호남지역에 첫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선발대로 공무계장을 맡아 청와대에 일일 보고하는 브리핑을 하게되면서 하루2만대의 덤프 트럭이 동원되는 임해공업단지에 공급되는 생활용수,공업용수를 공급하는 섬진강 물 공급하는 65km 구간에 대형관(1,650m/m) 부설공사,용수계장으로 긴급 투입돼 성공적으로 완공시켰다. 1975년 창원건설사업소 공사계장으로 당시 초연약지반으로 난공사였던 마산항 준설투기장 현장에 국내 최초로 PDM 공법을 시행, 성공시켰다.이 결과 과장으로 승진, 창원 항만과장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배 위에서 제작하고,잠수시켜 부력으로 케이숀을 띄워 설치 장소까지 인양 거치하는 안벽 공사에 필요한 후로뎅 도크를 제작했다. 1977년은 천갑병 회장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당시 해외 건설 붐이 일면서 천 회장도 민간 기업으로 이직한다. 여러 대기업의 건설회사에서 오퍼가 많았지만, 천 회장은 고향의 유일한 대기업으로 자기자본,기술력,사주의 도덕성, 신뢰성등 국내 건설업계에서 최고의 명성이 높았던 삼부토건(주)으로 옮긴다. 현장소장으로 영등포역 앞 지하상가와 지하도 공사였다. 당시 영등포 현장이 복잡한 공사였지만 2년만에 준공을 하면서 최우수현장으로 표창을 받았다. 1980년도부터 서울지하철 2호선(강남,북 연결)건설이 시작되자 교통량이 가장 많은 을지로 입구 구간을 서울시에서 삼부토건(주)을 선택하자, 을지로 현장 소장을 창업주이신 조 정구 총회장님께서 100여명의 현장 소장중 천 회장을 지목했다.을지로 입구에서 을지로3가까지 지하상가와 지하보도(길이90m) 구조물 밑으로 지하철 공사를 하는 난공사로 ‘파이프 루핑’방법을 국내 최초로 사용하면서 예산 절감과 공기를 단축시키는 기여를 했다. 이 공법으로 천 회장은 철탑산업훈장을 개인으로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1983년 장충동 지하철(3호선)공사가 적자 현장으로 고민이 커지자 현장소장으로 임명 받아 터널 구간을 신공법인‘NATM)으로 3개월만에 흑자로 전환 시켰다. 현장 주변에는 신라호텔, 엠버서더호텔이 있어 당시 VIP의 왕래가 많은 곳 이었다. 그러하기에 삼부토건으로서도 가장 핵심적인 현장으로 회사 차원의 조정구 회장님께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기에 현장의 모든 관리를 늘 완벽하게 준비하며 ‘삼부’의 명예를 빛낼수 있었다. 1992년도 지하철 4호선(사당동~경마장) 주재상무겸 소장을 맡았을 때 터널 막장에서 착암공의 안전사고 발생으로 현장 대리인인 내가 책임을 지고 43일간 교도소에 들어갔던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이 현장의 터널내에서 서울시 지하철 운행 방식은 우측 통행이고,철도청은 좌측 통행이므로 교차되는 곳이 ‘남태령 역’ 지나서 이루어진다. 천 회장은 이후 삼부토건(주)에서 퇴사, 2000년 삼부건설공업(주)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건설업의 모태인 삼부토건(주)에서 ‘토목 기술사’로 국가 기간 산업에 공헌을 하고 명예롭게 퇴사하면서, 삼부의 건설현장 주요 자재 생산기지인 삼부콘크리트공업(주)와 한국종합조경(주)이 합병한 회사의 초대 사장이었다. 1997년 11월 IMF사태로 많은 기업들이 감축과 폐업,법정관리,부도사태가 연속되는 불황의 상황에서 부실한 조경회사를 합병했지만,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면서 3년만에 부채를 해결하게 된다. 천갑병 회장이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로 제2의 성공을 거두게되는 계기이자 그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하며, 오너 일가에 더욱 두터운 신뢰를 받게된다. 2009년에는 상공회의소와 경영평가위원회 공동으로 기업체 전체를 분석한 결과, 건설업계에서는 신장률 500%인 삼부건설공업(주)이 최고로 평가 받았다. 이 결과 ‘대한민국 경영 혁신 대상’을 수상했다. 천 회장이 2011년 73세까지 직장 생활(CEO)을 할수 있었던 것은 항상 ‘초심을 잃치않고,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는 늘 고향 출신으로 두 번의 국무총리를 지내고, 한국 현대 정치사에 ‘3김시대’를 연 장본이기도 한 ‘JP’ 께서 써 주신 ‘구일신 일일신우일신 구상사무사’라는 글을 사장실에 비치해 놓고, 그 글의 뜻에 따랐다고 회고 했다.‘상선고사’ 노자의 도덕경 8장에서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보면서 힘있고,무서운 것 없는데도,가장 아래 자리로 흐른다’ 즉 ‘겸손함을 배우고,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가는 지혜를 저수지에서는 무진장 기다리는 인내를 꾸준히 흘러 바다에 이르는 성공’을 배웠다고 말하는 천 갑병 회장의 두 눈은 아직도 80을 넘긴 한국 근대사의 성장에 밑바탕을 둔 엔지니어의 정열적인 눈빛처럼 빛이 났다. 맨 앞에 말했듯이 천 회장은 “우리 백제인의 건축물을 보고 신라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검이불루 화이불치’라고 백제인의 정신을 표현했다.우리들의 조상들은 1500년전에 ‘개척정신’이 점철되었다. 국가가 살길은 기술개발 밖에 없다고 했고,삼성전자는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며 성과를 이루어 냈다. 이제 국가가 필요한 인재는 부여 출신 중에서 배출 되어야 한다. 연봉 수십억씩 받는 위치에 부여 출신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개척정신’의 DNA가 몸속에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으니 당연 하다고 본다. 인근 공주 출신 송자(전 연세대학교 총장)총장은 ‘세계에서 1등만 살아 남는다’고 했다. 특히 아산 출신인 이 어령(부여고등학교 1회)전 초대 문화부장관은 ‘무지개처럼 여러 가지 색깔이 하나되어 찬란하게 빛나라’고 부여고등학교 개교 60주년을 맞아 헌시로 말씀하셨다”면서 “이젠 부여의 후배들이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당부 했다. 천 갑병 회장은 “부고 4회 심상기(서울 미디어그룹 회장, 부여발전 연구회 명예회장)회장님의 그 큰 뜻과 모교와 고향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후배인 김종록(부여발전연구회 상임이사)재경부여군민회장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을 잇는다. 아주 오랫동안 김종록 군민회장을 지켜봤지만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다. 대학생 시절 ‘재경 부여 학우회’를 맡아 군민회와 인연을 맺은 김 종록 회장은 40여년을 봉사해오며, 지금도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우리 부여인들이 이젠 김종록 회장에게도 고마움을 더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선배로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강조했다. 천 회장은 “공직 생활에서 삼부토건(주)으로 직장을 옮기며 국내 건설업 면허 1호 기업의 일원으로 평생을 함께했다는 자부심으로 지금도 뿌듯하다”면서 “조정구 총회장님과 조남욱 회장님께서 보내주신 신뢰로 영원한‘삼부맨’이 될수 있었다”며 말했다. 천갑병 회장은 “고향 부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고향 소식을 보고 들으며 다시 고향을 찾게 해 준 21세기부여신문의 역할에 고맙다”면서 “10여년전 황규산 후배가 약관 30대 중반에 부여신문을 인수해 대표이사 취임을 할 때 참석하여 축하했지만, 솔직히 1년이나 버틸지 아주 큰 걱정을 향우들과 얘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라고 웃음을 지면서 “그런데 그 온갖 어려움을 딛고 벌써 17주년을 맞이 한다고하니 대견하고, 또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21세기부여신문은 100년이 지나도 역사를 기록하고 우리 부여인들의 ‘정신’을 이어가고 지켜줘야한다”고 덧붙였다. 천갑병 회장은 본보 발전기금 기탁에 앞서 ‘(재)나누리장학문화재단’과 ‘부여군 굿뜨래 장학회’에 각 각 1천만원을, 또 ‘석성산성보존회’,‘석성면지편찬위원회’에 각 각 5백만원을 기탁했으며, 지난 달에는 ‘연재 홍사준 선생 공적비 건립’에 1백만원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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