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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 대단원의 막 내려
'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 대단원의 막 내려
  • e부여신문
  • 승인 2021.04.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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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 연재. 지역 숨은 역사적 사실 확인 큰 성과. 부여 16개 읍면 직접 탐사 보도. 학습적 자료로도 활용 가치 커. 전국에서 보기드문 지역 문화재와 역사적 인물,향토 문화재등 탐사 보도 큰 발자취 남기기도...

2년 6개월에 걸쳐 기획 탐사 보도로 큰 화제를 모았던 ‘이진현의 부여 역사 산책’이 100회 ‘충신vs충노’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18년 12월 27일 ‘비운의 독립 운동가’를 시작으로 100회를 연재하면서 지역 곳곳에 숨어 있던 역사적 사료를 찾아 사실 확인을 위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이를 활자로 지면을 통해 세상에 알리면서 신선한 충격과 동시에 지역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알려졌다. 특히 지역의 학교와 동창회, 특정 가문과 연관된 보도는 폭발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 크게 알려졌던 사실을 돌아보게 하면서 전혀 알수 없었던 내용들에 대한 역사적 스토리는 지역의 큰 자산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향후 학습 자료로도 충분한 가치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더욱이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탐사 보도로 그동안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에서도 시도하지 못했던 기획으로 더 큰 가치로써 지역 향토 사학계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장장 2년 6개월에 걸쳐 밤 낮으로 부여 16개 읍면을 직접 현장을 찾아 또 전국의 도서관과 박물관등 철저한 고증을 거치며 100회 연재를 마치신 이진현 선생님께 21세기부여신문 5000여 독자들과 함께 감사를 드린다. 이번 연재를 마치며 앞으로 더욱 독자들께서 기대하는 수준 높은 양질의 기사를 발굴 연재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면서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100회(마지막회)  충신 VS 충노

 

 

 

 

 


 충노유신지비(부여 가탑리)         충복백종지묘(부여 능산리)

계백 성충 흥수(階伯 成忠 興首) 백제 삼충신에 여말 이존오(李存吾)와 조선조의 정택뢰(鄭澤雷). 황일호(黃一皓), 이들은 의열사에 배향된 ‘부여의 忠臣’들이다.
백 종(白 從). 유 신(惟 信). 김말산(金末山) 그리고 이름없는 설천선생의 가동. 광주이씨의 노비, 이들은 ‘부여의 忠奴’이다
충신의 역사는 햇빛에 화려하지만 충노의 역사는 달빛에 가려있다. 오늘은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부여 능산리 능안골에는 하동정씨의 부여입향조인 석성현감 정흥인의 묘가 장사축와형 명당에 자리잡았고 그 바로밑에 그의 6대손으로 임진왜란때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한 정득열(鄭得說)의 묘가 있다. 그의 묘 오른쪽 아래에 묘비와 상석까지 갖춘 묘가 눈길을 끄는데 주인공은 바로 정득열을 호종한 노비 ‘백 종’이다. 정득열은 무과출신으로 임진란때 사천현감직에 있으면서 의병과 관군을 지휘, 경상도에 침입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진주성 앞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렸으나 중과부적으로 순국한다. 그때 백 종이 주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부여땅으로 운구한다. 그리고 끝까지 주인묘를 지킨다. 그가 죽은후 정득열의 후손들은 주인묘 발치끝에 백 종의 묘를 만들고 봉제사 한다. 단갈형 비신에는 ‘충복백종지묘(忠僕白從之墓)’라 새겼다.
이번에는 묘대신 글로 행적을 남긴 충노 ‘김말산’ 스토리이다. 그는 부여읍 가증리에 대대로 세거해온 창원황씨가의 노비였다. 그가 모신 주인은 추포 황 신의 손자요 지소 황일호의 아들인 젊은 유학자 황 진(黃 璡)이었다. 그는 학문에 출중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송시열 윤선거등 당대의 석학들을 사사하며 향리에 은거한다. 김말산은 집사격인 외거노비로 “70평생 주인집 봉사에 힘을 다하여 새벽문안을 거르지 않고 속이지 않았으며 주인집 초상에도 친자와 같이 3년복을 입었다”고 전한다. 황 진은 자신의 문집 아술당유고(蛾述堂遺稿)에 김말산의 행실을 칭찬하는 글을 올린다. “김말산은 비록 용모(容貌)는 단소(短小)하나 강경 침잠 돈실(剛勁 沈潛 敦實)하고 지행고절(知行苦節)이 있다.....순충지행(純忠至行)이 처음과 같으니.....연후에 더욱 말산의 행동을 알겠도다“ 노비의 행실을 진솔한 필치로 문집에 담은 황 진의 푸근한 마음 씀씀이가 찡하다. 그 주인에 그 노비요, 부여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이다.
다음은 임진란때 선비의 몸으로 의병에 참여, 전투중 부상을 입은 주인을 부축하여 본가로 데려온 여흥민씨가의 충노 ‘유 신(惟 信)’의 이야기이다. 그의 주인 민 구(閔 構)는 백마강부(白馬江賦)를 쓴 민제인의 증손으로 부여에 세거해온 선비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뛰어들어 관동지방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한다. 그때 노비 유 신이 주인을 들쳐업고 고향에 돌아온다. 민 구가 죽은뒤 후손들은 주인묘 밑에 충노의 비를 세워 노고를 기린다. 주인 민 구와 충노 유 신의 비는 부여고등학교 뒤편 금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자그만 규수형비에 ‘충노유신지비(忠奴惟信之碑)’라 새겼다.
이어서 임천의 옥곡리에 있는 ‘설천선생충노비’로 가본다.
설천(雪川)은 백강 이경여의 현손인 이봉상(李鳳祥)의 호이다.이다. 경종조 신임사화때 할아버지 이이명이 사약을 받고 아버지 이기지가 옥중에서 물고를 당하자 역률에 의해 아들인 이봉상을 연좌하기 위해 금부도사가 들이 닥친다. 그때 이이명의 부인 광산김씨의 권유로 이봉상과 나이와 용모가 비슷한 가동(노비)이 이봉상의 상복을 입고 백마강에 몸을 날려 대신 죽는다. 금부도사가 가짜 이봉상의 시신을 확인할 때 진짜 이봉상은 또다른 노비와 함께 무주 구천동으로 피신한다. 영조가 등극한 후 주인가의 이이명 이기지는 신원 복관됐으나 충노는 전례가 없다하여 휼전(恤典)에 그치고 만다. 한참후 이봉상의 현손인 이용은이 선영 옥실마을 길가에 충노비를 세운다.
전면에 ‘설천선생충노기적비(雪川先生忠奴奇蹟碑)’라 새기고 후면에는 이름도, 묘도 잃어버린 미안함을 담아 충노의 갸륵한 행적을 남겼는데 근래에 각을 지어 풍우를 가렸다.
마지막으로 충화면 가화리 병목안 뒷산에 있는 광주이씨(廣州李氏)와 그녀를 호종한 무명의 노비 묘이다. 광주이씨는 광해군의 총신 이이첨의 딸이며 영의정 박승종의 며느리요, 그녀의 딸은 광해군의 세자빈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딸 세자빈이 목숨을 끊고 친정과 시댁도 풍비박산 되자 연좌의 위험에 처한 이씨부인은 노비한명을 대동하고 천리길을 달려 시댁의 연고가 있는 임천산골에 숨어산다. 그리고 회한에 찬 여생을 마친후 이곳에 묻힌다. 그때 이씨부인을 호종한 노비의 묘가 부인의 묘옆에 있다. 후손들이 세워준 작은 묘비에는 “우리 조상님을 모신 충정에 고마움으로 묘를 마련했다”는 문구가 새겨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최악의 노비제는 사라진다.
이제는 이름없는 노비들도 제대로 된 성과 이름을 호적에 올리게 됐다. 그때 노비의 수는 백성들의 3분지 1이 넘었다.
필자를 포함한 부여사람의 1/3은 노비의 후손일지 모른다.
충노는 바로 우리들의 자랑스런 조상이요, 그들의 발자취는 부여인이 결코 잊어서는 않될 엄연한 역사이다.
부여는 전국최다 충노유적(忠奴遺蹟) 보유군이다.
                                       (錦江舍廊 이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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