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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시인 신동엽 - 일곱번째
[탐사기획] 시인 신동엽 - 일곱번째
  • 21c부여신문
  • 승인 2011.11.2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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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 일곱번째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부여 능산리에 있는 신동엽의 묘. 윗쪽에는 부모 합장묘가 있다. 21c부여신문
신동엽 묘는 찾기가 쉽지 않다. 헤맨 뒤에야 가까스로 안내판을 찾았다.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 것일까? 21c부여신문
백마강변에 있는 신동엽 시비. 시 ‘산에 언덕에’가 새겨져 있다. 21c부여신문

百濟,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錦江,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그러나
찢기우지 않은 바람 버섯은
하늘도 못보고,
번식도 없다.

- 신동엽의 서사시 ‘錦江’ 23장 -


부여가 낳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시인 신동엽. 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부여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백마강변에 있는 그의 시비에 새겨진 시 ‘산에 언덕에’를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외산중학교에 다닐 때 중학교 대표로 부여 정림사지에서 열린 백제문화제 백일장에 참가해 시를 쓴 적이 있다. 그 이후 틈틈이 습작을 해온 터라 신동엽의 서정적인 시‘산에 언덕에’는 특히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 ‘산에 언덕에’ 중에서 -

대학교 때 신동엽의 시는 필독서였다. 1980년대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그의 시는 의식을 깨우는 죽비와 같았다. 특히, 해마다 4월이 되면 4.19혁명 기념 분위기와 맞물려 그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암송하고는 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라는 시는 허위와 위선을 부수며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노래했다.
이 시와 함께 인기를 끌었던 또 다른 시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였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는 기존 사고에서 탈피해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노래였다. 1990년대 초 전방 철책 부대에서 군 복무를 할 때 필자는 <신동엽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시인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부여 동남리 294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연순 씨는 가난한 농민이었다.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3년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읽은 책들은 향후 그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신동엽 평전>을 쓴 성민엽에 따르면 신동엽은 이때 일본 암파문고가 발행한 사회과학 서적과 엘리어트의 시와 시론 그리고 트르게네프와 크로포트킨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그는 좌우익 학생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는 등 곤욕을 치렀다. 이런 일들이 그의 시에서 엿보이는 무정부주의적인 경향과 무관치 않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1949년 9월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고향인 부여로 돌아와 인공 치하의 부여에서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한다. 그 뒤 부여가 인공 치하에서 해방된 뒤 신동엽은 국민방위군 소집영장을 받고 입대한다. 1951년 그의 나이 22세 때 대전 전시연합대학에 적을 두고 학업을 계속한다. 그러다가 1953년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제1차 공군 학도간부 후보생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정식으로 발령을 받지 못하고 친구가 하던 돈암동 헌책방에서 책방 일을 보며 지내다가 당시 이화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인병선을 만나게 된다. 1955년 동두천에 입대해 6군단 공보실에서 근무하다가 서울 육군본부로 전속되었으나 이듬해 의가사 제대했다.

그 해 겨울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했으나 낙선했다. 1957년 가을 충남 보령에 있는 주산농고 국어교사로 취직했으나 얼마 못가 피를 토하는 바람에 그만두고 요양차 고향인 부여로 온다. 이듬해 신동엽은 부여에서 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石林’이라는 필명으로 투고해 입선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당시 그의 등단은 문단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양주동이 쓴 심사평은 이렇다.
‘石林의 장시’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가 약간 선자(選者)를 놀래었다. 대단한 요설, 줄기찬 행진, 너무 얌전한 소리와 잔재주의 단장에 물린 시단은 이런 거칠은 호흡과 구비치는 장강을 기다리기도 하였겠다. 용어도 꽤 새롭고 가다간 무던한 경구도 금방 튀어나오고 무엇보다도 그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 하는 시법 시나리오적 구성이 좋았다.’

문단 데뷔는 신동엽의 일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데뷔 이후 첫 작품인 ‘진달래 산천’에서 그는 사상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 시달렸다. 이 시에 나오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라는 구절이 빨치산을 지칭한다는 비판이었다. 경직된 시대 상황은 시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언어 사용을 제약했다.

얼마 뒤 터진 4.19를 통해 그는 새로이 공간을 넓힌다. 자신이 다니던 출판사에서 <학생혁명시집>을 간행했다. 4.19혁명을 찬양하는 시 ‘阿斯女’도 썼다. 1961년부터 명성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작고할 때까지 재직했다. 1965년 쓴 ‘껍데기는 가라’와 1967년 쓴 장편 서사시 ‘錦江’으로 그는 문학사에서 확고한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한다.

그러나 한창 작품 활동에 물이 올랐을 때 병마가 그를 덮친다. 1969년 또 다른 장편 서사시 ‘임진강’을 쓰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간암으로 쓰러져 4월 7일 저 세상으로 갔다.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1957년 결혼한 부인 인병선 씨와의 사이에 정섭, 좌섭, 우섭 세 자녀를 둔 상태였다. 신동엽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김수영은 신동엽의 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신동엽의 걸작에는 우리가 오늘날 참여시에서 바라는 최소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강인한 참여 의식이 깔려 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 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

1975년 6월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됐다. 그러나 나온 지 불과 한 달 뒤 책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판매 금지됐다. 그런 뒤 이른바 민주화의 봄 시기인 1980년 4월<증보판 신동엽 전집>이 역시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됐다. 1982년 12월에는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을 제정했다.

신동엽의 묘는 원래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룡산 기슭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11월 20일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부여 능산리 산 56-2번지로 이전했다. 신동엽의 묘 위쪽에는 부모의 합장묘가 있다. 백마강변에 있는 시비는 1970년 세워졌다. 동남리 생가는 1985년 5월 문인들에 의해 복원되었고, 2003년 부여군에 기증되었다.
현재, 생가 옆에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다. 생가에는 부인 인병선 씨가 짓고 신영복 씨가 쓴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라는 시 ‘生家’가 걸려 있다.
능산리에 있는 신동엽의 묘는 처음 가는 이가 찾기가 쉽지 않다. 중간에 안내판이 없어서 헤매다가 겨우 묘소 앞 가까이 가서야 나무 안내판이 하나 나온다. 묘소를 찾아오는 이들도 많을 것 같은데 좀 친절하게, 처음 오는 이들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안내판을 제대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
부여 동남리에 있는 신동엽 생가. 21c부여신문
생가 옆에 기념관이 지어지고 있다. 21c부여신문




신동엽의 부인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 인병선
신동엽의 부인 인병선 여사는 짚풀문화 전문가이다. 21c부여신문
신동엽의 부인 인병선은 1935년 6월 26일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정식(농업경제학 권위자이자 동국대 교수)이다. 평양에서 11살까지 ‘보통국민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오빠는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아버지는 납북되었다. 당시 중 2년생이였던 인병선은 1·4 후퇴 직전 피난 대열에 섞여 어머니와 단 둘이서만 제주도로 피난와 살면서 중3에서 고2까지 제주도 오현중 마당 천막학교를 다녔다.

인병선의 어머니는 피난 올 때 가져온 재봉틀로 누런 광목을 표백해서 적삼을 만들어 팔아 생활했다. 문학을 꿈꾸며 바닷가에 나가 늘 혼자 놀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고1때 교수가 중앙대학 신학대학 청강을 권해 히브리어와 종교사를 배워 그 영향으로 나중에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이화여고 3학년에 다니던 1953년 겨울 서울 돈암동 네거리 고서점에서 철학계열 전문서적을 찾다가 “마음에 들지는 모르지만 이런 책은 어떨까요?” 하는 소리에 돌아보다가 ‘크고 빛나는 눈’을 발견하고 신동엽 시인에게 운명처럼 빠져들었다고 한다.
인병선(필명 추경[秋憬])은 신동엽(필명 석림[石林])과 연애편지를 주고받다가 다니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하고 1957년 결혼하여 신동엽의 고향 부여로 와 그 해 맏딸 신정섭을 낳았다.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열었다. 신동엽이 간암으로 죽은 뒤 인병선은 출판사에서 번역 등을 하며 혼자 1녀 2남(신좌섭, 신우섭)을 키운다.

인병선은 남편의 죽음 이후 짚풀문화를 만나게 되었다. 1년 내 힘들게 일하고도 어렵게 살던 농민들의 분신 같은 그것들이 급속하게 사라진다는 것이 그를 사로잡았다. 1978년부터 전국을 답사하며 짚풀문화를 조사·채록했고, 오키나와 국립민족학박물관 연구원을 역임했다. 계간 민속지 ‘생활용구’를 창간했다. 일본, 중국 등 동남아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짚풀문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니면서 짚풀문화와 관련한 자료수집과 연구로 짚풀문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게 되었다.

인병선 관장이 설립한 짚풀생활사박물관은 1993년 문화관광부에 등록,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서 운영하다가 200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으로 이전하였으며, 짚풀 특히, 볏짚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설립한 박물관으로는 세계에 유일하다. 짚을 삼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으며, 짚풀문화연구회를 통해 교육도 하고 있다.

2008년 자신이 운영하던 짚풀생활사박물관에 대한 사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평생 수집해온 유물을 온 국민이 함께 뜻 모아 관리하는 체제로 가게 하기 위해 ‘짚풀문화재단’을 만들어 비영리 재단법인화하였다. 현재, (사)짚풀문화연구회 회장으로 있으며,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전문위원(8년간), 한국박물관교육학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이 프로그램(기획 기사)은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취재)한 것입니다.

. 21c부여신문
필자 소종섭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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