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이번 호부터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
규암의 상징은 엿바위이다. 규암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서울에 있는 재경규암면민회 산악회 이름도 ‘엿바위 산악회’이다. 엿바위는 수북정 앞에 있는 자온대 바위를 일컫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규암 나루 앞에 ‘엿바위 나루’라는 한글 표지석이 있었다. 규암리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흘과 초나흘 날 수북정과 자온대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고려 말엽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이틀에 걸쳐 네 번의 제사를 지내는 흔치 않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규암면이 ‘규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914년이니 채 100년이 안 되었다. 당시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부여군 천을면 도성면 송당면과 홍산군 해안면, 임천군 북방면 일부를 합해 규암면이라고 이름 지었다. 총 면적 47평방km로 19개 법정리(33개 마을)가 있으며 2012년 말 현재 4천3백49가구 1만6백68명이 살고 있다. 최근 하우스 재배가 활발한 데 수박 멜론 등이 주종이다. 수박은 480농가, 멜론은 86농가가 종사하고 있다. 이장환 규암면장은 “수박과 멜론의 경우 부여군 전체 생산량의 30% 가량을 규암면에서 생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연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전국 6년근 홍삼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인삼공사 규암인삼창도 규암 내리에 있다. 옮겨 간다, 아니다 등 말이 많았으나 지난 2일 부여군 시무식 때 인삼창 관계자가 나와 “옮길 계획이 없다”라고 확실하게 밝히면서 논란이 잦아드는 흐름이다. 규암인삼창 측은 올해 어르신 초청 잔치 계획 같은 지역 사회 공헌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등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규암은 1968년 10월 백제대교가 만들어지기 전만 해도 부여읍보다 규모가 컸었다.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았을 만큼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당시 규암나루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금 규암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2층집은 당시 번성했던 규암의 모습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부여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모습의 건물을 보기가 흔치 않다.

규암면은 최근 과거의 명성을 서서히 회복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합정리 일대를 중심으로 백제역사재현단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롯데리조트, 골프장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상권이 활기를 띠고 있다. 부여의 ‘신도심’이 규암면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 일대에 늘어나는 음식점들이 그 반증이다.
규암의 정신을 상징하는 곳은 백마강변 부산(浮山)에 있는 대재각이라고 할 수 있다.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日暮途遠·날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멀어 마음에 지극한 아픔이 있다)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는 각석이 있는 곳이다.

북벌의 원대한 꿈을 꾸었던 효종 임금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현장이다. 영의정을 지낸 백강 이경여 선생이 올린 상소에 대해 효종이 내린 답변의 핵심 내용이 ‘지통재심 일모도원’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여덟 글자를 써 자신의 제자이자 이경여 선생의 셋째 아들인 이민서에게 주었다. 이것을 이경여 선생의 손자인 이이명이 1702년 바위에 새긴 것이 현재 전하는 대재각 각서석이다. 이처럼 대재각은 부여의 진취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부산(浮山)은 백제 시대에 日山(금성산), 吳山(오석산)과 함께 신선이 살았다는 삼신산의 하나였다. 신선들이 세 산을 오가며 백제를 호위했다는 전설이 있는, 국가적으로 신성시 했던 산 가운데 하나였다. 기슭인 진변리에 백강 이경여 선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을 모신 부산서원이 있고 그 앞에 이경여 선생이 명나라에서 가져다가 심었다는 동매(冬梅)가 있다.

호암리에는 천정대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여현 북쪽 10리쯤에 있다. 강 북쪽에 절벽으로 된 봉우리에 큰 암석이 대(臺) 같이 되어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백제 때에 재상을 임명하려면, 뽑힐 자의 이름을 써서 함 속에 넣고 봉한 다음, 바위 위에 놓았다가 조금 뒤에 이를 취하여 보고, 이름 위에 도장 흔적이 있는 것으로 재상을 삼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혹은 정사암(政事巖)이라고도 일컫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김무환 前 군수 시절 지은 ‘천정대’라는 정자가 있다. 임금 바위, 신하 바위 등이 있고 백제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천정대는 백제의 임금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늘의 뜻을 묻거나 기도했던 장소가 아닌가 추측된다.
신리 일대에는 도무재 성터(울성산성)가 있다. 백제부흥군들이 나당군에게 저항하다가 몰살당한 현장이다. 660년 11월5일 무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7일 간 혈전을 벌인 끝에 7백 여 명의 백제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수목리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손꼽히는 유명한 감 생산지였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스토리를 되살려 감 농사를 다시 일으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성리는 조선 말기 동학 혁명이 일어났을 때 책임자인 복주채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군이 마을 전체를 불살랐던 아픈 기억이 있는 마을이다.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기획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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