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④ 장암면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④ 장암면
  • 소종섭
  • 승인 2013.02.28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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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연재 순서
①외산면
②규암면
③초촌면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취재를 하기 위해 장암면을 찾은 날은 지난 2월 19일이었다.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지났는데도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바람은 휘이익~, 휘이익~, 소리를 내며 거세게 백마강을 때렸다. 물결은 빠르게 서해로 흘러갔다. 이날 따라 강물은 시리도록 맑고 푸르렀다. 장암 강변에 서서 일렁이는 강물을 보며 역사의 흐름을 생각했다.

정암리 백마강변에 있는 마당바위(맞바위)에서 장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21c부여신문

‘장암’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마당바위(맞바위)’이다. 정암리 백마강변에 있는 마당처럼 넓은 바위, 즉 마당바위에서 장암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고도문화사업소장을 지낸 이종관 장암면장은 “마당바위가 문화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조사해 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정암리 출신으로 재경부여군민회장을 지낸 이만용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이사장은 “어릴 적에는 마당바위에 올라가 놀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풀이 우거져 접근하기가 불편하다. 인근 주민들은 ‘땅정바위’라고도 불렀다.

장암은 시설 원예 특히 수박 생산을 통해 연 2백억원이 넘는 소득을 올리고 있다. 21c부여신문

장암면이라는 이름이 생긴 때는 1914년 3월 1일이다. 고려 때는 가림현, 조선 때는 임천현에 속했다. 동북부는 금강, 서쪽으로는 금천이 흐르고 있어 물이 풍부하고 일조량이 많다. 시설 원예 작물을 재배하기에 좋은 조건이어서 해마다 재배 면적이 늘어나고 있다. 밭은 별로 없고 임야(51.1%)와 논(23.5%)이 대부분이다.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 기준 3천1백72명으로 남녀가 거의 반반이다. 농특산물로는 수박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다.

정암리에는 전주 이씨 무풍군 이총의 사당인 영모재가 있다. 21c부여신문

말 나온 김에 정암리 얘기를 더 풀어보자. 정암리에는 조선시대 3대 정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상진 선생의 감군은곡 시비가 있다. 부여문화원에서 1992년 선생의 시비를 이곳에 세운 이유는 상진 선생이 이 시를 지었다는 월파정이 정암리 백마강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고향에 내려올 때면 월파정에서 백마강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타면서 감군은곡을 불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월파정 밑에는 선생이 낚시를 즐겼다는 요월대가 있다. 정암리에는 연산군을 폐위하려다가 부친과 5형제가 함께 죽임을 당한 무풍군 이총의 사당인 영모재도 있다. 또한 사적 제 373호로 지정된 정암리 와요지는 백제·고려시대 가마 형태가 그대로 발굴되어 가마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적지로 꼽히는 곳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조차 힘들지만 1950년대 만해도 맞바위 마을에는 나루가 있었고 주막이 2~3개나 있었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정암리에 있는 감군은곡 시비(위), 월파정터(아래) 21c부여신문

합곡리에 있는 ‘조선의 명재상’ 상진 선생의 유허비. 21c부여신문

장암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인 상진 선생과 관련해서는 합곡리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합하골이라는 이름 자체가 정승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지금은 옛 집터에 선생의 출생지라는 것을 알리는 비석만 하나 서 있다. 후손들은 정비 사업을 계획하고 있고 주민들은 안내판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합곡리는 또 백제시대에 가림성(지금의 성흥산성)을 근거지로 백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벌에 나선 무령왕이 진을 쳤던 곳이다. 이곳 우두성을 근거로 무령왕은 백가를 공격해 죽인 뒤 그의 목을 베어 백마강에 던져 반란을 진압했다.

장암은 한때 금광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지토리 천광산이 그 현장인데 1930~1950년대까지 월 20kg 가량 금을 채취하며 호황을 누렸다. 당시에는 냇물이 노랗게 변해 흘렀을 정도였다. 1970년대까지도 금광이 있었으나 현재는 폐광되었다. 일제시대를 전후해서는 석동리의 장암초등학교 인근 돌광산에서 규암면 외리까지 철길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캔 돌을 바퀴 네 개 달린 구루마에 실어 철길로 운반해 규암 외리 부근 백마강변에 쌓아 홍수 등을 예방했다. 철길 흔적은 사라졌지만 돌을 캐던 돌광산은 반토막 난 산이 남아 있어 그 옛날을 증언한다.

장하리 3층 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백제계 석탑’의 대표격으로 꼽힌다. 21c부여신문

상황리는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임천 조씨의 시조묘가 이곳에 있다. 남산골 서쪽 오암산 아래에 왕릉이라는 설이 있는 큰 무덤 3기가 있다. 원문리는 수원 백씨의 집성촌으로 유명한 마을이고 점상리에는 이방원(조선 태종)의 스승이었던 회양도호부사 조신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장하리에는 보물 제184호로 지정된 장하리 3층 석탑이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모방해 만든 이른바 ‘백제계 석탑’으로 불리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여인의 날렵한 맵시를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장암과 관련 있는 역사 인물로는 고려 말에는 조신 선생, 조선시대에는 상진 선생이 있다. 조신 선생은 본관이 풍양이며 본명은 사렴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문하시중과 평장사를 역임한 조맹의 후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회양부사를 지내 ‘회양공(淮陽公)’으로도 불린다. 조선 건국 이후 제자였던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정3품 통훈대부의 품계와 사복시정의 지위를 추증 받았다. 조선 후기 세도 가문 가운데 하나인 풍양 조씨 회양공파(淮陽公派)의 분파조(分派祖)이다. 숙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조상우, 영조 때에 2대에 걸쳐 우의정과 좌의정 등을 지낸 조문명·조재호 부자,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과 헌종 때 외척으로서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이끈 조만영·조인영 형제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처럼 후손들이 영화를 누렸기 때문에 점상리 덕림고개에 있는 그의 묘는 ‘조선의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장하리 장정마을은 애국지사를 여섯명 배출한 자랑스러운 곳이다. 21c부여신문

상진 선생은 목천 상씨이다. 황희, 허조와 함께 조선의 3대 정승으로 꼽힌다. 합곡리에서 태어나 조선 중종·명종 때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에 15년 간 있었다.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위 관직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해를 당함이 없이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평소 거문고를 즐겨 탔다고 하는데 그가 지은 감군은곡은 ‘사해바다의 깊이는 닻줄로 잴 수 있겠지만 임금님의 은덕은 어느 줄로 잴 수 있겠습니까?(이하 생략)’ 하는 내용으로 임금의 덕을 예찬하는 내용이다. 부여에는 은산 내지리에 후손들이 모여 사는데 선생의 초상화를 모신 제각이 이곳에 있다.

석동리에서 태어나 삼부토건을 창업한 조정구 前 회장의 묘. 21c부여신문

근·현대 들어 장암 인물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장하리 장정마을은 강석기 강철구 강일 강성모 강일구 강병국 등 여섯 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진주 강씨들이다. 이들은 대종교 등을 매개로 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한 마을에서 여섯 명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곳은 전국에서도 장정마을이 유일하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대한민국 건설업 면허 1호인 삼부토건을 창업한 조정구 前 삼부토건 회장과 명지대학교를 설립한 유상근 前 총장도 석동리에서 태어났다.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기획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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