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보릿고개 모르는 자식들
[목요광장] 보릿고개 모르는 자식들
  • 이규원
  • 승인 2013.02.28 15: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방행정체험기 1>

1968년 5월 부여군에서 시행한 9급 행정직(당시 5급을) 공개경쟁시험과 1년 반 기다려 1970년 2월 발령받은 첫 근무지 외산면에서 1년 2개월 후 선거 전에 떠밀려 연고지 초촌면으로 이동 근무한 1976년도까지 나는 식량증산정책사업 말단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청와대습격사태와 예비군 창설, 1969년 10월 3선 개헌국민투표, 1971년 4월 박 대통령 3선, 1972년 10월 유신(維新)으로 독재정치심화 등의 격동기를 맛보며 살았다.

1970년 2월 20일 부여군수(심춘택)실에서 시험동기 이승현(장암면 출신)씨와 함께 사령장을 받고 버스로 자갈길을 1시간 이상 달려 외산면사무소에 가 면장(김길현)에게 신고 후 나는 산업계로 동기는 총무계로 배치 받았다. 그때 외산면 인구는 7,387명(부여군177,829명)이고 직원은 정규 20명과 보건요원 3명이었다.

그 이튿날부터 사무실은 인내심 실험과 가혹한 담근질하는 악마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매일 4~5개 마을을 출장하여 호별 방문해서 논보리 파종을 구걸하고 야근으로 정리해야 했다.

이 사업은 관청의 일방적 추진으로 저항이 만만치 않아 요령과 넉살이 부족한 새내기는 실적부실로 직속 상관들이 날마다 공포분위기 속에서 내리치는 채찍의 끝을 피할 길이 없었다.

또 다른 담당업무 산림단속과 연인원12,000명이 동원되는 민둥산 조림사업, 석탄·규석·갈포 생산실적 파악, 소·돼지 도축허가 처리, 야산개발초지 조성, 뽕나무 식재관리 등으로 코피 날 지경이었다.

이때의 월급이 12500원이었으니 당시 쌀 80kg 1가마니에 4500원(도시는 5000원)으로 따져 3가마니 값이 못 되었다. 총각 동료 6명과 어울리고 하숙비 내면 모자라서 집에다 손 벌릴 때도 있었다.

허둥대다 겨울과 봄날을 빼앗기고 여름을 맞이하니 이제는 모내기 현장에 투입되어 7.5치X7.5치 등 정방형 못줄을 걷어 내고 10치X4치의 이른바 1:4식 장방형 못줄을 들이미는 모내기 지도를 해야 했다. 1:4식은 포기수를 늘리면서도 통풍이 잘 되어 병충해도 줄면서 다수확이 되므로 멱살 잡혀도 현장에서 설득해야 하는 정부와 졸병들의 입장이었다.

하루는 3인 1조가 되어 청양군 경계 수신리에서 불량 못줄을 걷다가 주인이 안 뺏기려고 당기는 바람에 동기 이승현(2년후 퇴직, 국가직 이동) 씨의 손가락이 잘릴 뻔 했으며, 어떤 날은 쇠 시렁 들고 달려들어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순발력을 발휘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곡식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할 요량으로 여름에는 산야초 베어 퇴비생산, 가을이면 소 몰고 나와 논갈이 등 강압적 식량증산권장사업들은 제2근무지 초촌면에서도 반복되었다.

그 시절 전국의 군(郡) 단위 읍면 직원들은 다 그렇게 숙명적으로 운동화 끈 졸라매고 논두렁, 밭두렁을 뛰며 땀 흘려야 했다. 이런 처지를 하늘이 굽어 살피셨는지 대한민국의 가장 큰 숙제였던 ‘보릿고개’를 해결할 수 있는 비결(秘訣)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것은 정부 프로그램으로 서울농대 허문회 교수가 10여년 걸려 만든 기적의 볍씨 ‘통일벼’ 연구개발의 완성이었다. 재래식 벼는 300평당 백미 80kg 3가마니 정도 밖에 수확 못 했으나 통일벼는 5~6 가마니나 수확 된 것이다.

1972년부터 종자보급을 시작하여 1975년도에는 ‘보릿고개’를 완벽히 허물며 산업화 성공과 함께 부강한 국가로 달릴 수 있는 기반을 튼튼하게 만든 것이다. 이 위업(偉業)은 통치자의 이마에 독재의 딱지는 붙였으나 ‘경제개발’의 행군에는 기꺼이 참여해준 현명한 국민과 공직자들의 땀으로 이루어 낸 것이었다.

지난 설날에 보릿고개 언저리 40년 전 이야기를 30대 자식들에게 들려주었더니 “쌀 떨어지면 라면 끓여먹지 미련하게 왜 나물죽을 먹느냐”고 말해서 이 철부지들한테 “보릿고개는 1970년대 중반까지 가을에 수확한 쌀이 이듬해 초봄에 바닥이 나 6월의 보리수확이 되기 전 한두 달을 서민들은 나물죽으로 때우며 굶주려야 했던 춘궁기(春窮期)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의 자화상(自畵像)이었다”라고 설명을 하자니 심기가 편치 않았다.

ㄴㄴ 21c부여신문

이 규 원
前 부여군청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