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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매월당(梅月堂) 김(金)시(時)습(習) - 여덟번째
[탐사기획] 매월당(梅月堂) 김(金)시(時)습(習) - 여덟번째
  • 소종섭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회장
  • 승인 2011.12.0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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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여덟번째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매월당은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21c부여신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인 김춘수의 시 ‘꽃’이다.
“명산과 대천에는 오직 공의 발자취만 두루 남았으며,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 홍유손이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길이 멀어 달려가지 못하고 지었다는 제문의 한 대목이다.
무언가 통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역사 인물이다. 1493년 3월에 병들어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은 죽으면서 다비를 하지 말고 절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3년 뒤 승려들이 가묘를 파보았더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승려들은 그가 틀림없이 부처가 되었다고 여겨 다비를 했다. 그리고 부도를 세웠다. 이때 그의 몸에서 나온 사리가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김시습의 부도. 이곳에서 나온 사리가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1c부여신문
매월당 김시습에 대해서는 이미 부여신문에 한차례 쓴 적이 있다. 7주년 창간기념호에 ‘매월당 김시습은 누구인가’라는 글로 김시습의 일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 이번에는 문학적인 부분에 좀 더 중점을 두어 살펴보았다. 두 글을 종합해 읽는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매월당 김시습에 대해서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시습의 저서로는 <매월당집>, 단편소설집인 <금오신화>, <4유록> 6권, 시집 9권, 사부 1권, 정론, 철학 논문 및 기타 산문들로 엮은 문집 3권 등 모두 19권 5책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지은 시는 수만 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해지는 것은 2천2백여 수에 불과하다. 또 <역대연기> <사방지> <기산기지> 등을 지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시습의 문학적 업적 가운데 특히 빛나는 것이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창작한 것이다. 29세 때인 1463년 그가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며 창작한 단편소설집이다.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묶여 있는데 <이생규장전>이 대표적이다. 이생과 최랑의 순결한 사랑을 주제로 해 봉건적 윤리도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대에 앞서는 지향을 보여주면서 외적에 대한 불굴성과 고결한 지조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생과 최랑이 행복하게 살다가 홍건적의 난을 맞아 양가가 몰살되고 혼자 살아남는 이야기이다.

이밖에 <만복사저포기> <남염부주지>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가 있다. 소설에는 저승, 귀신, 염라대왕, 용궁 등이 등장한다. 요즘 말로 치면 환타지 소설이다. 실제로 최근 환타지 붐과 더불어 금오신화가 주목되고 있다. <금오신화>는 선조 때 간행된 <매월당집>에 빠져 있다. 당시의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금오신화에 등장하는 귀신 등 환타지적인 요소는 당시 조선사회가 수용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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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는 한마디로 한 총각이 부처와 윷놀이 대결에서 이겨 처녀를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처녀는 실제가 아니라 귀신이다. <취유부벽정기>는 홍생이 선녀를 만난 이야기이다. 밤에 선녀를 만나 시를 주고 받으며 재밌게 놀았는데 다음 날 선녀가 사라져 실망한 이야기이다. <남염부주지>는 한 남자가 염라대왕이 되는 이야기이다. 과거에 떨어진 한 남자가 꿈에 염라대왕을 만나 토론을 벌인 뒤 죽어 염라대왕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용궁부연록>은 한 서생이 용왕의 부탁을 받고 상량문을 지어준 뒤 용왕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서울 수락산에 있는 매월정. 21c부여신문
현존하는 2200수에 달하는 김시습의 시는 산하를 떠돌면서 서민들의 아픔과 삶에 공감한 내용이 많다(‘산골농민의 고생’ 같은). 노동없이 무위도식하며 자리만을 탐하는 고관들을 비웃는 시(‘딱따구리’ 같은), 나라를 걱정하는 시(‘고민에 잠겨서’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성거산에 오르면서’ 같은)도 많다. ‘나의 삶’ 등 자신의 삶을 노래한 시문도 적지 않다. 김시습의 시는 사실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함축성이 있고 감칠맛 나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당대 서민들에 대한 애정과 탐관오리 권력층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은 사상성과 예술성이 조화를 이룬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서경성보다는 서정성이 짙다. 단순히 경치보다는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에 담았다.

매월정 주변에 매월당의 시들을 적어 놓았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시 뿐만 아니라 <애민의> <인신의> <인군의> <애물의> 같은 자신의 정치 사상을 담은 논문도 많이 썼다. 이들 논문에서도 김시습의 뛰어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애민의>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군주가 자기 지위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민심이 따르면 만대라도 군주 노릇을 할 수 있으나 민심이 이탈되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해서 평민이 되고 만다. 군주와 평민의 사이가 털끝만한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 어찌 감사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나라의 창고에 쌓인 재물은 모두 백성들이 마련한 것이며 윗사람들의 의복, 신발은 바로 백성들의 살가죽이며 음식 요리는 백성들의 기름이며 궁전과 차마(車馬)들도 백성들 자신의 힘으로 이룩되는 것이며 세금, 공물 및 일체 필수품도 죄다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기본을 삼아야 한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요약하여 말한다면 어진 정치를 베풀자는 것이다.’

<천지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사람이 되었다고 하여 자만하지 말라. 윗사람이 자만하면 아랫사람도 자만하고 아랫사람이 자만하면 윗사람을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찬탈의 징조는 아래에서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싹이 튼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은 허심하게 남의 의견을 접수하고 나라일을 망치는 임금은 교만만 부리다가 남에게 모욕을 당한다. 겉으로 나타나는 위험은 방지할 수 있으나 속으로 곪아가는 위험은 방지하기 어렵다.’

매월당 김시습은 어떤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면모를 지녔다. 그는 사상가이자 철학가였다. 종교인이었고 문학가였다. 국토의 아름다움을 기록한 기록가이자 여행가였다. 유교·불교·도교에 통달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그는 비판 의식이 강했으나 그가 비판한 것은 무위도식하며 명리만을 탐하는 권력가들이었지 체제 자체나 고관 자체를 비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성종 대에 이르러 현실 정치에 참여할 기대를 안고 경주에서 서울로 상경했을 만큼 체제 밖에서 떠돌았던 이단아만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시문에도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현실 정치에 대한 참여 의욕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여럿이다.

그가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데에는 그와 관련한 수많은 기행들이 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많은 기록물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이 없었다면 그는 어쩌면 역사 속에 한 신화적인 존재로만 우리에게 남아 있을지 모른다.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그의 사상과 삶이 지금도 조명되는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른다.

[김효종]
김시습이 모셔져 있는 홍산 청일서원에는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김효종이 배향되어 있다. 김효종은 1414년에 태어나 1493년에 세상을 떠났다. 광산 김씨 20대 손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사복시정(정3품)에 이르렀다. 단종의 폐위를 당하자 고향인 부여에 내려와 홍산 서운산에 은둔했다. 전설에 따르면 김시습이 시를 주며 “만수산 앞에서 고인을 만났으나 말없이 한 달을 지냈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효종은 스스로 지은 글에서 “오래도록 한 지방에서 이름 없는 늙은이가 되었고 마음만은 지조를 굽히지 아니한 것을 자신만이 홀로 안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당시 김효종의 절의를 높이 평가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생육신이 아니라(김효종까지 포함해) 생칠신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김효종이 은거하며 단종을 추모했던 내산 운치리 서운산에 있는 궁검대. 21c부여신문

그는 비록 몸은 멀리 있었지만 상제의 예를 갖추고 단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날마다 궁검대(弓劒臺)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궁검대는 내산면 사무소가 있는 운치리 서운마을 뒷산 8부 능선에 있는 약 3.5m높이의 바위이다. 부근에 서운암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자취를 찾기 힘들다. 높은 바위에 해서체로 궁검대라 새겨놓았는데 여기에서 궁검이란 임금의 죽음이나 장례를 뜻하는 말이다. 1452년(단종1)에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이 인륜대의를 버리고 1455년(세조1)왕위를 찬탈했다.
김효종은 이때 세조로부터 국록을 받는 것을 꺼리고 사퇴하고 부여로 은거했다. 그 후 영월에서 단종이 승하하자 내산면 운치리 뒷산인 서운산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해가 뜨면 매일같이 궁검대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피눈물로 통곡하며 3년을 지냈다.
김효종이 은거하며 단종을 추모했던 내산 운치리 서운산에 있는 궁검대. 21c부여신문
매월당 김시습과 도의로 사귄 것으로 알려졌고 평생 검소한 옷과 음식으로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일각에서는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에 무량사로 온 것을 김효종과 연결해 보기도 한다. 김효종을 만나기 위해 무량사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 평전>을 쓴 고려대 심경호 교수는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는 거리가 불과 20~30리에 불과했고 단종에 대한 기본적인 절의가 같았다는 점에서 매월당이 무량사에 머물고 있을 때 만났을 가능성은 있다.
부여군은 김효종 선생의 충의, 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2007년 9월에 궁검대를 향토유적지로 지정했다. 김효종은 청일서원 외에도 세조 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충신들을 모신 동학사 숭모전의 서무에도 배향되어 있다.
김시습과 김효종을 모신 청일서원. 김시습을 모신 최초의 서원이다. 21c부여신문

[청일사]
청일서원은 김시습과 김효종을 모신 사우이다. 1621년에 심종직이 부여현감으로 있을 때 무량사 옆에 제각을 세워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이다. 당시 제각의 이름은 절의사 또는 청풍각으로 불렸다. 효종 때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숙종 때 조정으로부터 淸逸祠라는 사액을 받았다. 매월당 김시습과 관련해 최초로 창건된 사우로서 4백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884년에 다시 지어졌다. 1895년 오옹 김효종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한때 김시습의 호를 따 동봉서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모습은 197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청일서원은 청풍각과 제실, 사우 등으로 이루어져 제법 형식을 갖추었으나 들어가는 입구가 좁고 퇴색하여 그 역사와 의미에 비해 옹색한 느낌을 주었다. 형식은 갖추었으되 정신을 계승하려고 찾는 이들이 없어 그저 바람만이 서원 주위를 맴돌았다.

이 프로그램(기획 기사)은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취재)한 것입니다.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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