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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
부여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
  • 한봉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승인 2011.12.08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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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낙화암(落花巖) : 충남문화재자료 제110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백제는 한강유역에서의 한성시기를 시작으로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었다. 특히, 백마강이 감싸 흐르는 부여에는 부소산성, 정림사지, 왕흥사지, 궁남지 등 많은 유적지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백제(百濟) 또는 의자왕(義慈王)’하면 우선 ‘삼천궁녀(三千宮女)’와 ‘낙화암(落花巖)’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낙화암 21c부여신문


부소산 서쪽에 백마강을 굽어보는 가파른 암벽 절벽이 있다. 이 절벽 낭떠러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낙화암’ 이다.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부여성(夫餘城)이 함락되자 궁녀들은 적군에게 항복하여 굴욕을 당할 것을 알고 충절과 굳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변 바위에서 투신하였다. 이 투신한 바위가 곧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 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다.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화암’의 본래 이름은 사람들이 떨어져 죽은 바위란 뜻으로 ‘타사암’이었는데 후에 언제부터인가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고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으로 미화하여 ‘낙화암’이라고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우암송시열 글씨 21c부여신문

낙화암 절벽 중턱에는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1607∼1689)이 쓴 것으로 알려진 ‘낙화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한 낙화암의 높이 솟은 절벽 위에는 육각지붕의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는 1929년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백화정(百花亭·충남문화재자료 제108호)’이란 이름을 붙였다.
백화정 21c부여신문

부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낙화암’하면 ‘삼천궁녀’를 연상하면서 이야기하곤 한다. 과연 실제로 ‘궁녀의 수가 3천 명이였을까?’ 너무나 궁금하다!
삼천궁녀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의 인구와 대비하여 살펴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문인들의 글에서 전설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삼천궁녀’라고 언급한 글은 찾아 볼 수 없다.

조선시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문인 김흔(金訢·1448∼1492)이 지은 「낙화암」의 시구 詩句 에 ‘삼천’이라는 숫자가 나타나고, 민제인(閔齊仁·1493∼1549)의 「백마강부(白馬江賦)」라는 시에서 ‘궁녀의 수가 삼천’이란 글을 찾을 수 있다.그리고 ‘삼천궁녀’가 실존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삼천궁녀’라는 이야기는 의자왕의 실제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역사를 극적으로 묘사한 시적(詩的)표현이 아닐까? 한다.

21c부여신문
한 봉 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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