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4월부터 초촌면에서 6년 가까이 근무하고 군청으로 옮길 때까지 주로 새로 생긴 업무가 아니면 사고처리 대타로 몸은 고달펐지만 다양한 행정 경험을 할 수 있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때 주민성향을 파악(.X.△표시)해 제출하라는 명령을 따르면서 가슴앓이 많이 했지만 막상 투표일에는 엄정한 분위기 속에서 공명선거가 이루어져 위안이 되었다.
추곡(벼)과 하곡(보리) 수매는 군량미와 곡가 조절이 목적이었으므로 통일벼가 본격 생산된 1975년까지 국가적 중요 업무이었다. 할당된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신참 직원들이 부대끼다 고육지계(苦肉之計) 로 고안해낸 것이 전라북도 평야지대까지 원정하여 한 가마니당 100원(짜장면 140원 할 때)씩 웃돈을 주고 매입하는 것이었는데 100가마니만 되어도 봉급의 3분의 1을 날려야 했다.
산업계에서 양수기 담당할 때는 가뭄대책으로 웅덩이 파서 모내기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양수기 20대를 정비해놓고 주민들의 신청 즉시 출고해야 했으며, 그 업무를 국가에서 감독하였는데 육사 졸업한 병아리 소위들로 구성된 감찰반이 들이 닥쳐 커피 한 잔 안 마시고 양수기 작동과 먼지 앉은 상태까지 파고들 때는 땀이 났었다.
새마을사업 담당하던 첫해 1971년에 시멘트 335포 1972년에 시멘트 500포 철근 1톤을 23행정리에 무상 배포하여 그것을 토대로 마을안길포장·담장개량·지붕개량·하천정비 등의 사업으로 천지개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낮에는 카메라 메고 요동치는 그 현장을 뛰고 밤에는 상황정리와 실적평가 받을 준비를 해야 했다. 연말 평가결과 송현리와 송정리가 우수자립 마을로 선정되어 전국 새마을 관계자들의 견학코스가 되었을 때는 가슴 뿌듯하였다.
1973년 7월 병무사고가 발생되어 병사업무를 갑자기 맡게 되었다. 규정대로 집행하면 별 탈 없는 업무라 적성에 맞는가 했는데 종교관계로 2명의 병역 기피자가 발생되어 힘들었다.
서울까지 출장하여 경찰관서 협조를 받아 모두 검거하고 병무청에 인도했는데 한 명은 교도소에서 나오는 날 밤 내 집에 방문하여 “덕분에 교도소 잘 다녀왔다”며 굳이 안 해도 될 인사를 해서 밥맛 떨어지게 하고, 또 한 명은 그의 누나가 아버지 6촌 동생에게 시집온 사돈벌 되는 동네 후배여서 오래도록 처지 곤란했었다.
1975년 7월 전국 동시에 주민등록증 갱신 발급을 위하여 경찰과 합동반 편성이 되어 마을 순회작업을 할 때 면사무소 담당자가 ‘백지용지 관리를 부실하게 한다’고 하여 작업 하루 만에 대타로 투입되어 1개월간 병사업무를 중단하고 마무리 해준 적이 있는데 담당자였던 동갑내기 내 친구한테는 미안스러웠다.
1976년 9월 신설된 민방위 업무를 맡아 900명의 민방위 자원을 관리하였다. 교육훈련 때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소집하였다. 출석 확인 전에 대열을 정돈하기 위하여 ‘앉아 일어서’의 구령을 핸드마이크로 했는데 그 대열 속에 집안 아저씨들이 많아서 어색하였다.
그것은 약과였다. 수년 후 새카만 고향 후배가 그 업무를 하면서 면소재지 마을이장 따님과 결혼했기에 소집교육 시 사위는 ‘앉아 일어서’ 구령 붙이고, 장인(리대장)은 대열 속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해서 지금도 그 이야기 하며 뱃살 잡는다.
한 다리 거치면 사방팔방이 사돈에 팔촌되는 인척이고 친구와 선·후배들 인데 그 속에서 안면몰수하고 못줄걷어내기·강력세금징수·퇴비증산·도로부역·산림단속·기피자검거 등을 성실하게 집행하면 싸가지 없는 인간 되고, 인심 쓰면 직무태만과 무능력자 되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시절이라서 고향 면서기는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지금 은 잘 사는 나라 되어 몹시 힘들었던 그 업무들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별천지 되었다.
![]() 이 규 원 前 부여군청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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