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연재 순서 |
①외산면 ②규암면 ③초촌면 ④장암면 |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
4월26일, 홍산 태봉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홍산면을 내려다보니 낮은 구릉지대에 넓게 펼쳐진 건물들이 눈에 쏙 들어왔다. 평야지대와 구릉지대가 조화를 이루는 아기자기 한 지형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크게 모나거나 드세지 않고 순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여읍에서 서쪽으로 17km지점에 있는 홍산면(면장 이윤병)은 예부터 부여 서부 지역의 중심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에는 지금의 외산 내산 구룡 옥산면 남면 등도 홍산현에 속했다. 홍산 중심지인 북촌리, 남촌리 일대에는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듯 제법 모양새가 있는 옛 건물들이 눈에 띈다.
이 가운데 서양식으로 지어진 2층 규모의 옛 저포(모시)조합 건물은 지난 200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홍산은 백제 때는 대산현, 통일신라 때는 한산현 지역이었다. 2013년 1월 11일 현재 인구는 3천3백35명. 60대 이상 인구가 40%인 1천3백56명에 달한다.
역사가 있고 중심 역할을 하다 보니 홍산에는 자연히 문화유산도 많다. 우선 관아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 흔치 않는데 동헌과 객사, 형방청 건물 등이 있어 조선시대 건축과 행정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와 자리 배치, 각 기관의 위치, 건물 양식 등 하나하나가 연구 대상이다. 동헌은 현의 수령이 행정 업무를 보던 관청, 객사는 외부 손님들을 접대하던 곳, 형방청은 죄수들을 심문하고 가둬놓던 곳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동헌의 앉음새가 탁월하다”라고 극찬한다. 이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고종 8년(1871)에 만들어진 동헌은 해방 이후 홍산지서로 사용되다가 1984년 들어서야 현재 모습을 되찾았다.
관아는 홍산 남촌리에 있는데 말끔한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비석이 뒹굴고 복원 공사가 진행되는 등 어수선했다. 관아가 행정의 중심지였다면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는 향교였다. 부여는 향교가 네 곳 있는 드문 고을인데 이 가운데 한 곳이 홍산에 있다.

의식 공간인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홍산은 이처럼 관아와 향교가 어우러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조선시대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고장이다.
홍산 향교 옆에는 5백년, 객사 옆에는 7백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있어 옛 정취를 한껏 돋우었다. 관아가 복원이 완료되면 관아-향교를 묶어 조선시대로의 여행을 떠나는 기획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아가 있는 남촌리는 ‘홍산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많이 장세가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부여에서는 큰 편에 속한다. 지금도 인근 보령과 서천, 강경 지방에서 장꾼들이 모여들 정도로 나름의 세를 유지하고 있다. 홍산장은 조선 중기만 해도 중부지방에서 군산장, 강경장과 함께 3대 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보부상들이 마지막까지 홍산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홍산은 또한 고려 말의 명장 최영 장군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태봉산이 그 현장이다. 이곳은 진포대첩,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말 3대 왜구대첩의 하나인 홍산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최영 장군은 1376년 60세 노구를 이끌고 이곳에 와 왜구들을 무찔렀다.
태봉산 꼭대기에는 최영 장군과 고려병사들의 무공을 기리는 홍산대첩비가 서 있다. 1977년 당시 정연달 부여군수가 비를 세웠다. 글은 초대 국립부여박물관장인 홍사준 선생이 짓고 글씨는 현재 부여유림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후송 유희열 선생이 썼다. 홍산면민들은 지난 2003년부터 ‘홍산대첩문화제’를 열어 최영 장군과 고려병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올해도 지난 4월 16일 부여문화원 주최로 문화제가 열렸다.
홍양리 5층 석탑과 상천리 마애불을 찾는 이들도 많다. 홍양리 5층 석탑은 고려시대 탑인데 얇은 낙수면 등 백제계 양식을 계승해 만든 석탑이다. 충남도지정유형문화재 제140호인 상천리 마애불은 상천리 태봉산 중턱에 있다. 고려시대에 백성들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높이가 6m에 달한다. 언뜻 봐서는 윤곽을 구분하기 힘들어 자세히 보는 가운데 형체를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
최근에는 알음알음 알려져 등산을 하기 위해 상천리와 내산 천보리의 경계에 있는 천보산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높이가 325m에 불과하나 암릉이 이어져 높이에 비해 제법 맛을 느낄 수 있는 산이다.
그렇다면 홍산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청일사일 것이다. 1621년 광해군 때 창건된 청일사는 교원리에 있는데 이곳에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과 오옹 김효종 선생이 모셔져 있다. 김시습과 관련해 처음으로 창건된 사우인데 1895년 김효종 선생을 추가로 배향했다.

두 사람 모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느껴 절의를 지켰던 인물이다. 김시습 선생은 <금오신화> 등을 쓴 문학가이자 유불선에 정통했던 철학자, 여행가, 기록가 등 실로 다양한 면모를 지닌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사복시정(정3품) 벼슬에 있던 김효종 선생은 단종이 폐위되자 고향 부여에 내려와 내산 운치리에 있는 서운산 궁검대에서 정의가 무너졌음을 날마다 통곡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청일사는 외산 무량사 부근에 있었으나 유림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효종 때 현재 위치로 옮겼다. 청일사는 실로 홍산의 기개를 상징하는 자랑스런 곳이다.
[홍산 순씨를 아시나요?]
홍산은 홍산 순씨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홍산 순씨는 현재 전국적으로 1천여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부여에는 15가구가 주로 홍산·옥산 일대에서 살고 있다. 홍산 순씨의 시조는 고려 경종 때 태어나 목종 때 진사를 지낸 순경진이다.
조선 세조 때 자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사복시정을 지낸 순한량이 홍산으로 낙향하면서 본향을 홍산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홍산 순씨’가 시작된 것이다. 역사 속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금산전투에서 순절해 칠백의총에 묻혀 있는 순성걸의 이름이 전한다.
32대손인 순낙영 씨(전 옥산면 부면장)는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이몽학의 난 때 세가 많이 줄었다. 이몽학을 가르친 선생이 순씨였는데 조정에서 3족을 멸한다고 하니 종친들이 대거 다른 성씨로 바꿨다고 한다. 이때 숫자가 확 줄었다”라고 말했다.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기획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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