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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최영 장군 아홉번째
[탐사기획]최영 장군 아홉번째
  • 21c부여신문
  • 승인 2011.12.1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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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아홉번째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태봉산 정상에 있는 홍산 대첩비와 태봉루. 태봉루 글씨는 홍산면 조현리 출신의 유명 서예가인 원곡 김기승 선생이 썼다. 21c부여신문

홍산면 동·북쪽에는 북촌리가 있다. 면사무소, 파출소 등이 있는 홍산의 행정 중심지이다. 북촌리 마을은 고려 초기에 홍산 순씨가 새로운 성씨로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했으며 이어 창원 황씨가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말기에는 홍산현 군내면에 속해 있었는데 마을이 홍산군청의 북쪽에 있었기에 북촌(北村)이라 불렸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좌촌, 여단리 일부를 병합해 정식으로 북촌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북촌리에는 충남문화재자료 368호로 지정된 태봉산성(태봉산)이 있다. 역사적으로 이성계의 황산대첩,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 토벌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서울 인왕산 국사당에 모셔져 있는 최영 장군. 최영 장군은 숨진 이후 무속의 신이 되었다. 21c부여신문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왜구(倭寇)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출현해 약탈이나 살상을 일삼기 시작한 것은 고려 제30대 왕인 충정왕 2년(1350) 부터이다. 무사 등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는 물론 그 전에도 존재했으나 100척 이상의 대규모 선단을 이루어 우리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왜구는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부터 힘을 키워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공민왕 때인 1357년에는 왜구가 강화도 교동도까지 침략할 정도였으니 이들은 단순한 해적 집단을 넘어 상당한 세력을 갖춘 노략집단이었다.

왜구가 처음에 주로 노린 것은 식량을 운반하던 조운선이었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면서 육지로 진출해 재물을 약탈하거나 사람을 잡아가 노예로 파는 등 점차 난폭해지고 전쟁 양상을 띠었다. 고려가 멸망에 이른 데는 왜구가 이처럼 발호한 것도 한 몫을 했다. 또한 이성계 등 고려의 신흥 세력은 왜구 토벌을 통해 공을 세워 대중들로부터 신망을 얻으면서 정치적인 기반을 확보해 조선을 건국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홍산 태봉산은 이러한 고려 말의 치열했던 왜구와의 격전 현장이자 최영 장군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부여에 깊이 각인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사>를 보면 왜구들이 부여에 출몰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11년 간의 상황을 유추해 보면 당시 왜구의 출현으로 부여 지역민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고 고통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기록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7월 - 왜구가 부여·석성과 연산 개태사 공격
우왕 3년(1377) 11월 - 왜구가 부여·홍산·정산 침략
우왕 4년(1378) 3월·10월 - 왜구가 임천 침략
우왕 6년(1380) - 왜구가 부여·정산 등을 공격한 뒤 계룡산으로 달아났다가 잔당이 청양·홍산 등에 출몰
우왕 8년(1382) 2월 - 부여 임천 석성에 왜구 침략
우왕 13년(1387) 10월 - 임천·홍산에 왜구 출몰

홍산대첩이 일어난 것은 1376년이다. <고려사>는 최영 장군이 홍산대첩에 출병하게 된 상황과 장군의 활약상을 이렇게 전한다.
왜적이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를 무찔렀는데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는 패배해 전사하였다. 최영이 이것을 듣고 토벌을 자청하니 우왕은 최영이 늙었다(당시 장군은 60세였다) 하여 만류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보잘 것 없는 왜적이 이와 같이 난폭하니 이제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에는 더욱 대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장수를 보내면 확신성 있게 승리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 휘하 군사도 평소에 훈련이 없으니 쓸 수 없습니다. 저로 말하면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종묘와 국가를 편히 하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일념뿐입니다. 곧 휘하를 인솔하고 나가 싸우게 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재삼 요구하였다. 이에 우왕이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최영은 밤낮으로 행군하였다. 이때 적은 늙은이와 약한 자를 배에 싣고 곧 돌아 가려는 듯이 보이면서 몰래 용감한 정예부대 수백 명을 내지로 깊이 침입시켜 약탈하니 가는 곳마다 수수방관할 뿐이고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홍산(鴻山)에 이르러서 함부로 살육과 약탈을 감행해 기세가 대단히 강성하였다.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급히 홍산(鴻山)으로 가서 전투에 앞서 우선 요해처에 의거하였다. 그곳은 3면이 다 절벽이고 오직 길 하나가 통할 뿐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전진하지 못하였으므로 최영이 몸소 사병의 선두에 서서 정예를 전부 동원해 돌진하였다. 적은 바람에 풀잎이 쓰러지듯 하였다. 이때 적 1명이 숲 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서 입술을 맞혔다. 최영은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안색은 태연자약하였으며 그 적을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그런 후에야 맞은 화살을 뽑았다. 최영은 더욱 용감히 싸워 마침내 적을 거의 모두 대파해 포로 또는 살육해 버렸다. 판사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였더니 우왕이 대단히 기뻐해 박승길에게 은 50냥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을 보내 최영에게 의복과 술 및 안마(鞍馬)를 주고 또 의사 어백상(魚伯詳)을 시켜 약을 가지고 가서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최영이 개선하자 우왕이 신하들에게 명령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갖은 놀이판을 차려 놓았으며 그 의식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때와 비슷하였다. 궁중에 들어가서 우왕을 만나니 우왕이 주연을 배풀고 묻기를 “적의 수효가 얼마던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 수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여러 재상들이 물으니 “적이 만일 많았더라면 이 늙은이는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왕이 공로를 평정해 시중(侍中·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임명하려 하였더니 최영이 굳이 사양해 말하기를 “시중이 되면 제때에 전선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인바 왜적을 평정한 연후라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을 봉하였다. 동시에 다른 장군과 병사들에게도 등분에 따라 상을 주었다.]

홍산현 행정의 중심이었던 홍산동헌. 왜구에 맞서 싸우는 중심지였다. 21c부여신문

홍산대첩으로 왜구 토벌사에 한 획을 그은 최영 장군은 누구인가. 그는 강원도 철원 사람이다. 태어나기는 외가인 충남 홍성군 흥북면 노은리 114번지에서 태어났다. 철원 최씨 가문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는데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은 사헌규정(종 6품)을 지냈다. 장군은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말을 평생 지키면서 청렴하게 살았다. 1388년 철령위 설치 문제(명나라에서 우리나라 북쪽 땅 일부를 요동에 복속하겠다는 요구)가 제기되자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가 되어 이성계와 조민수 장군에게 병력 3만8천 명을 주어 요동 출정을 명령했다.

그러나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여름에 출병하는 것’ ‘왜구가 원정군이 나간 틈을 노릴 수 있다는 것’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못하고 전염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것’ 등 이른바 ‘4불가론’을 내세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졸지에 죄인이 되어 체포되었다. 고봉현(지금의 고양)과 충주 등지로 유배당했다가 창왕 즉위 원년인 1388년 12월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당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묘소가 있다. 조선 태종 때 대제학을 지낸 변계량은 장군의 충절을 이렇게 읊었다. ‘一片心應不死 千秋永與泰山橫·일편단심은 결코 죽는 일 없이 천추에 태산처럼 솟아 있으리라)’

<고려사> 최영 열전은 장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창왕이 마침내 최영을 죽였다. (최영 장군의)나이 73세였다. 처형될 때 언사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죽던 날 서울 사람들은 저자를 중지하였으며 어디서나 이 소문을 듣고는 거리의 어린이들이나 시골 부녀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체가 길가에 놓여 있었는데 오고 가는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도당(都堂·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 하는 곳)에서 양식과 피륙 및 종이를 부의하였다. 최영은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또 청렴하였다. 전선에서 적과 대치해 태연하였으며 화살이 빗발 같이 지나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는 규율을 엄격히 해 필승을 기하였으며 전사가 한 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다. 그러기에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에서 어디서나 승리를 쟁취하였고 일찍이 패한 적이 없었다. 최영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을 무렵에 훈계하기를 “너는 금덩이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고 하였다. 최영은 이 말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집이 초라하였으나 그 곳에 만족하고 살았다.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해 간혹 식량이 모자랄 때도 있었다. 남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의복을 입은 것을 보면 개나 돼지만치도 여기지 않았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으나 뇌물과 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그 청백함을 탄복하였다. 조그마한 문제에 구애되지 않았다. 종신토록 장군으로서 군대를 통솔하였으나 그 중에서 얼굴을 아는 자는 수십인에 불과하였다. 전시에 바쁜 중에도 이따금 시를 읊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어느 날 저녁에 여러 재상과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경복흥이 부르기를 “하늘은 옛 하늘이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하자 최영이 대구를 놓아 말하기를 “달은 명월이로되 재상들은 밝지 못하구나”라고 하였다. 남이 정의에 배반하는 것을 보면 깊은 증오로써 통렬히 배격하였다. 당시 이인임, 임견미가 정방 제조(政房提調)로 있으면서 정권을 마음대로 독판 치고 변안열(邊安烈) 등이 마음이 맞아 권세를 부렸다. 어떤 사람이 벼슬을 요구하였을 때 최영이 말하기를 “네가 장인바치나 장사꾼이 되었으면 벼슬은 저절로 얻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정권을 잡은 자와 뇌물을 쓰는 무리를 비난한 것이었다. 최영이 정방(政房)에 참여한 후부터는 반드시 공로가 있거나 재능 있는 자를 선택해 채용하였고 만일 등용할 자격이 없는 자라면 사정없이 배격하였으며 재상들 중에 영리를 꾀하거나 전민(田民)을 쟁탈하는 자 또는 사정에 끌려 법과 풍기를 훼손하려는 자는 모두 시정해 주었다. 일찍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매우 곤란한데 당신은 수상(首相)으로서 어찌 이것을 우려하지 않고 다만 가정 살림에만 관심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인임은 입을 벌리지 못하였다. 언제나 도당에 나가서는 정색하고 바른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그러자 좌중에서 공명하는 자가 없으면 혼자서 탄식하곤 하였다. 언젠가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국가 정치에 관해 밤중에 생각하고 날이 새어서 그것을 동료들에게 말하면 여러 재상들 중에서 나와 의견이 같은 자가 없으니 사직하고 은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질이 우직(愚直)하였으며 또 무식해 일을 모두 자기 뜻대로 처리하였으며 사람을 죽이고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 해 죄가 죽이기까지 할 것이 아닌 데도 많은 경우에 사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沼宗)이 최영을 비평하기를 “공은 이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는데 세상에서 이것을 명담이라고 하였다.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하였다. 아들 최담(崔潭)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홍산에서는 2003년 이후 해마다 홍산대첩문화제를 열어 최영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숨진 고려 무명 용사들의 넋을 위로한다. 21c부여신문

홍산 태봉산 정상에는 홍산대첩비가 있다. 1977년 당시 정연달 부여군수가 홍산면민을 중심으로 한 군민들의 뜻을 모아 비를 세웠다. 故 홍사준 선생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유희열 선생이 썼다. 홍산에서는 2003년부터 최영 장군과 홍산대첩에서 숨진 이름 없는 고려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홍산대첩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홍산 태봉산은 600여 년 전 고려 명장 최영 장군의 용맹과 기개를 만천하에 보여 준 부여인들이 꼭 알아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홍산대첩문화제’가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러한 정신을 제대로 살리고 선양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프로그램(기획 기사)은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취재)한 것입니다.

필자 / 소종섭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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