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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⑦ 구룡면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⑦ 구룡면
  • 소종섭
  • 승인 2013.06.04 1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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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연재 순서
①외산면
②규암면
③초촌면
④장암면
⑤홍산면
⑥양화면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구룡평야. 1966년 경지 정리를 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방문했었다. 21c부여신문

“인심은 좋고 땅은 기름지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건설이 예정되어 있는 평택~부여 간 고속도로가 구룡면에 있는 서부여인터체인지를 통해 연결된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더욱 높다. 지금도 귀농하려는 이들이 많은데 살 집이 없어서 못 올 정도이다. 구룡면의 미래는 밝다”지난 5월 31일 만난 최용석 구룡면장은 구룡면의 내일은 현재보다 훨씬 발전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사실 지금의 구룡면은 겉보기에 내놓을 만한 것이 많지 않다. 문화유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큰 공장이 있거나 면세가 강한 것도 아니다. 2013년 1월 22일 현재 구룡면의 인구는 2천6백74명,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34%인 9백24명에 달한다.

구룡평야로 상징되듯이 논이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평야 지역이다. 지금은 빛바랜 모습이지만 옛 부여8경의 하나로 ‘구룡평 낙안(구룡평야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습)’이 있었던 이유이다.

구룡면민들은 주로 딸기, 수박, 대추토마토, 밤 등을 재배해 연간 1백80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대추토마토와 밤은 부여군 생산량의 많은 부분을 구룡면에서 담당하고 있다. 딸기는 이마트에 납품되는 ‘아침딸기’가 유명하다.

구룡은 굿뜨래 밤의 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부여에서 처음 상업적으로 밤을 생산하기 시작한 곳이 구룡 현암리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처음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부여 밤은 이후 점차 재배 면적을 넓혀 가면서 지금은 ‘굿뜨래 밤’ 상표로 전국 제일의 밤 생산지로 거듭났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구룡 현암리는 부여 밤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마을이다.

이봉배 한국밤재배자협회 부여지회장은 “현암리는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밤 신품종을 들여와 전국에서 처음으로 곡수림을 조성한 마을이다. 당시에 1만 그루의 밤나무를 이곳에 심었다. 이 밤나무가 부여와 공주 등 인근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밤재배자협회 부여지회에서 꾸준히 양묘 작업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척화파였던 윤집 홍익한 오달제를 모신 창렬사. 21c부여신문

구룡면에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우선 금사리에 있는 창렬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렬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였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끌려가 목숨을 다한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 세 사람을 모신 사우이다.

우암 송시열이 1671년 이들 3인의 전기인 <삼학사전>을 지으면서 역사에 이들의 이름이 남았다. 구룡의 정신은 창렬사에 모셔져 있는 이들 삼학사의 뜻을 이어 받는 데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창렬사는 1717년 숙종이 온양에 행차했을 때 유생 이덕함 등이 삼학사와 관련한 사우를 건립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졌다. 숙종이 충청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삼학사 중 한 명인 윤집의 묘소가 부여(내산면 온해리)에 있으니 부여에 사우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경종 1년(1721년)에 창렬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충절인을 모신 곳이라 하여 보존되었다.

창렬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금사리 성당은 1901년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처음으로 세워진 유서 깊은 성당이다.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143호로 지정되었다.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부여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해 이미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1886년 병인박해 이후 도앙골(지금의 내산 금지리) 신자 다섯 명 등 여러 명이 순교하기도 했다.

ㄴ 21c부여신문

1906년에 지어진 금사리 성당. 부여군 최초의 성당이다. 벽돌의 조화가 아름답다. 21c부여신문

지금의 금사리 성당 부지는 양반 출신으로 부유하게 살다가 몰락한 윤교리씨 소유였다. 공베르 신부는 당시 돈 1천3백냥으로 금사리 가옥 3동과 대지, 답, 임야 등을 사들였다.

1901년 5월 건축에 착공해 1906년 4월 초에 완공했다. 1913년 9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금사리 성당의 초대 본당 신부는 프랑스 출신의 공베르 신부였다.

그는 1901년 4월 27일부터 1923년 5월까지 활동했다.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의 지도신부로 있다가 한국전쟁을 맞아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그해 11월 13일 옥사했다. 금사리 성당은 신부·수녀 10여 명을 배출했다.

일제시대 때까지 이곳 금사리는 전국 최고의 모시 생산지였다. ‘쇠양이 모시’ 하면, 전국에서 제일 이름 있는 모시였다. 주민들도 모시로 소득을 크게 올리곤 했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구봉리에 있는 이몽학의 집터. 연못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21c부여신문

구봉리에는 이몽학의 집터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몽학은 선조 29년(1596년) 홍산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인물이다. <선조실록> <쇄미록> <연려실기술> 등에 따르면 그는 무량사에서 군사 조련을 실시했으며, 홍산 쌍방축에서 주둔하며 군사를 모았는데 6~7백 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해 7월 난을 일으켜 홍산·임천현은 물론 정산·청양현 나아가 대흥(지금의 예산)까지 점령했다. 따르는 군사가 한때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홍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부하였던 김경창 임억명 태근 등이 변심해 그의 목을 벰으로써 10일 천하가 끝났다. 이몽학의 난과 관련해 능지처참 된 사람만 33명, 처형된 사람만 100명에 달해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었다.

이몽학의 집터는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다. 황정안 참우리신협 이사장은 “구봉리에 있는 이몽학의 집터는 한때 연못이 1천평 가까이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논으로 바뀌고 흔적만 남아 있는 정도이다”라고 설명했다. 구룡면에서 제일 높은 망신산(344미터) 정상에는 이몽학의 전설과 관련 있는 말무덤이 있다.

독락정.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하자 이흥의 전 부여현감은 벼슬을 버리고 이 정자를 짓고 남은 생을 지냈다. 21c부여신문

죽절리에는 이용규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해 의병장 민종식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이다.

죽절리에는 또 광산 김씨 오옹공파 시조인 오옹 김효종 선생의 묘소가 있다. 홍산 교원리의 청일사에 모셔져 있는 김효종 선생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느끼고 낙향해 절개를 지켰던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도지사를 지내는 등 친일파로 이름 높은 김서규의 이름을 구룡과 관련해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동생이 일제강점기 때 구룡면장을 지내는 등 그는 구룡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태양리에 있는 고인돌. 21c부여신문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기획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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