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무소에서 군사무소(군청)로 오르는 사다리를 찾기 시작한 것은 초촌(草村)면에서 병사 볼 때 홍산(鴻山)면에서 병사 보던 김종국(전 부여군과장) 씨가 군사무소로 간 지 얼마 안 된 1976년 초촌면 정기감사 때 내가 처리한 서류를 점검할 때부터이다.
친구 사이가 갑(甲)과 을(乙)의 관계로 변한 것에 충격 받고 인사실무자에게 나도 군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고, 군수와 교류하고 있던 양조장사장 이준철(전 도의원) 씨에게 지원요청을 하는 등 그물을 치고 기다리던 1977년 3월 주사보(7급)에서 서기(8급)로 강임되어 내무과 복지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무과에는 행정 예산 감사 복지 통계 병사 위생 등 7개계가 있었고, 내가 맡은 업무는 대한민국 의료복지의 효시(嚆矢)인 영세민 의료보장이었다. 늦게 충원되어 처리할 일이 쌓여 있어 사무실 옆에 하숙집을 정하고, 동료 김덕기(전 부여읍장) 씨와 함께 한 달 동안 야간작업을 하여 정부시간표에 맞출 수 있었다.
근무하면서 불편했던 것은 이틀이 멀다하고 내무과장이 복지계 전원을 집합시키고 고함을 지르며 질책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혼나는지도 모르면서 사무실 직원들한테 민망하고 자존심 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전시청에서 전입된 지 얼마 안 되는 계장(윤모 씨)이 3살 아래인 과장(김모 씨)의 비위를 잘 안 맞추는 것에 대한 보복성 질책이었으며 참으로 낮선 그림이었다.
1977년 7월 병사계 차석 이윤옥(전 내무과장) 씨가 승진되어 나가게 되자 병사계장(정천면 씨)이 그 자리로 러브콜 해서 복지계를 4개월 만에 떠나게 되었다.
계장 밑에 직원은 나 뿐이고 방위병 2명이 있었으며 징병검사, 현역입영, 소집자원(보충역), 기피자검거, 예비군 1만여 명 관리, 동원훈련집행 방위협의회 운영 등의 업무로 근무시간의 반은 병무청과 군부대에서 보내야 했다.
1979년 여름, 4천여 명의 징병검사를 집행하기 위해 병무청에 한 달 간 나가 있는 어느 날 군청에 내려와 병사계장(조수범 전 논산시국장) 혼자 장정(壯丁)숙소를 관리할 때 심야에 장정들의 싸움으로 머리가 터져 계장이 입고 있던 메리야스를 찢어 응급조치 하고 후송시켜 큰 일을 면한 적이 있었고, 병무청에서 실시하는 전국시군 업무평가에서 최우수 기관 표창을 받아 군수와 과장한테 기쁨조가 되기도 하였다.
강임된 지 2년을 넘겨도 승진 기회마다 의외의 인물한테 추월 당하여 불만스러웠다. 인사실무자에게 알아보니 승진 순위자 명부에 매번 1위(사실은 순위를 알려주면 안 됨)로 되어 있지만 3~5배수 안에서 군수가 결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79년 7월에도 강임된 지 1년도 안 되는 이모 씨를 승진시켜서 어린 마음에 참지 못하고 사직서와 ‘돈 받고 승진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담은 편지를 군수 면전에 던져놓고 대전으로 나가 영화관에서 하루 해를 보내며 ‘퇴직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귀가하는 길목에서 병사계장한테 잡히고 말았다.
내가 도망친 후 ‘내무과장과 함께 불려 올라가 군수한테 벼락을 맞았으며 면사무소로 쫓아 보내라고 하여 장시간 빌고 진언(進言)해서 수습되었으니 내일 출근해야 된다’는 계장의 말을 듣고 설복(設伏) 당해야 했다. 그리고 두 달 후 강임 2년 반 만에 주사보로 원상 회복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 말에 일주일간 병무청에서 시군 합동으로 현역과 소집자원을 분류하고 명부와 통계작성을 하는 정리징병(整理徵兵)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앞으로 한두 달은 한숨 돌리며 일 할 수 있겠구나’하고 콧노래 부르며 캐비넷 정리를 하고 있을 때 행정계장(조종학 전 유성구국장)이 다가와 ‘자네 내일부터 행정계에서 근무하게 됐어’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그 시절에는 행정계로 발탁되면 품성과 능력을 인정받고 군수의 측근이 되며 승진이 보장되는 선망(羨望)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이 규 원 전 부여군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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