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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⑩ 임천면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⑩ 임천면
  • 소종섭
  • 승인 2013.07.16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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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연재 순서

①외산면 ②규암면 ③초촌면
④장암면 ⑤홍산면 ⑥양화면
⑦구룡면 ⑧내산면 ⑨석성면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7월 13일 늦은 오후,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 임천 성흥산(260m)에 올랐다. 홀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 옛날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웠던 백제 부흥군의 함성 소리를 들었다.

정상에 올라보니 강경, 익산, 부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백마강 굽이가 선명했다. 옛날 백제 시대에는 아마 성흥산 가까이까지 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강 옆에 우뚝 선 성흥산은 침략군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곳이었다. 반면 백제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흥산을 이렇게 서술했다. ‘수륙의 요충지이다. 당나라 유인원이 손인사와 더불어 부여풍(扶餘豊)을 공격할 때 모든 장수와 의논하니 한 장수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마땅히 이를 먼저 공격하여야 한다” 했다. 유인궤가 말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치라 하였다. 가림성은 험준하고 견고하니 이를 치려면 군사의 손상을 볼 것이요, 대치하고 있으려면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하여 드디어 주류성으로 달려갔다.’

사랑나무는 각종 드라마 촬영지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21c부여신문

성흥산 꼭대기에는 그 유명한 ‘사랑나무’가 있다. 2006년 방영되었던 SBS드라마 ‘서동요’에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이 나무 밑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계백> <여인의 향기> <신의> 등 숱한 드라마의 촬영지로 각광받는 것은 물론 일출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나이가 400년 정도 된 이 느티나무는 형형함을 자랑하고 있어서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 최근에는 사랑나무 밑에 누군가 돌탑을 쌓아 더 운치가 있다.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 연인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가림성은 테뫼식 산성이다. 21c부여신문

높이가 3~4m, 길이가 800m에 이르는 가림성(성흥산성이라는 이름 대신 원래 이름인 가림성을 되찾았다.)은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에 축성 연도가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이다. 꼭대기에 머리띠를 두르듯 봉우리를 중심으로 바깥에 성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성 안에 우물터 등 유물이 남아 있다.

가림성 안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을 모신 유태사지묘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측근이었던 유금필은 정서대장군, 정남대장군, 도통대장군으로서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가림성에 있는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사당. 21c부여신문

그를 기리는 사우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된 이유에 대해 1929년 발행된 ‘부여지’의 ‘성흥산성 실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백제가 망하자 왕자 풍이 이 성에 들어와 웅거했으나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 때에 유태사 금필이 전남장군으로 전라도 순천군 산성으로부터 바야흐로 송도를 향해 가던 중 임천에 오게 되었다. 유장군은 이 성에 올라 주민 가운데 빈궁한 자를 진휼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은덕을 잊지 못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성흥루 전경. 21c부여신문

성흥루 현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글씨다. 21c부여신문

무송 유씨 후손들이 사당 옆에 유금필 장군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성흥산 꼭대기에 있는 성흥루 현판 글씨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썼다.

임천면민들은 해마다 4월이면 성흥산 충혼사에서 나당연합군에 스러져 간 백제 무명장졸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충혼제를 지낸다.

임천은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가림현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인구 33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면이지만 임천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에 임천군이 되면서 인근 20개면을 관할했다. 조선 후기까지 400년 동안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한 큰 고을이었다. 1914년 부여군에 편입되어 임천면이 되었다. 임야(45.1%)와 논(27.6%)이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산품으로는 오이가 으뜸이다. 파프리카, 토마토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일본 미야기현 와쿠야초와 22년 동안 민간교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와쿠야초는 749년 백제에서 건너간 경복(의자왕 5대손)이 일본 와쿠야 지방장관이 되어 일본에서 최초로 금을 채굴해 東大寺 건립 당시 금 약 13kg을 헌납한 지역이다.

황금새 전설이 있는 대조사 미륵불은 소나무와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인다. 21c부여신문

성흥산에 있는 대조사는 황금새 전설이 있다. 이런 내용이다. ‘죽기 전에 불상 하나를 세우는 것이 소원인 노승이 있었다. 기도를 하다가 깜빡 졸았는데 꿈속에서도 불상을 세우게 해달라며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부시게 찬란한 황금빛 새가 날개를 펼치고 노승에게 왔다. 새는 노승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바위에 내려앉았다. 빛이 더 찬란해지며 온 천지가 환해졌다. 노승은 눈이 부셔 손으로 빛을 가리다가 잠에서 깼다. 깜짝 놀라 바위를 보니 바위가 불상으로 변해 있었다.’

대조사는 지난해 11월, 원통보전 낙성식을 해 사역을 새로이 했다. 요즘에는 사슴 ‘해탈이’가 경내에서 방문객을 맞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동문선’을 지은 조선의 대표적 문장가 가운데 한 명인 서거정은 임천과 관련해 이렇게 읊었다.

‘들으니 당나라 군사 일찍이 이곳에 주둔했을 때
어찌하여 신라 장수 침범해 괴롭혔나.
웅진강 한 줄기는 하늘과 함께 맑은데
마을의 못 봉우리 땅에 연해 그늘졌네.’


임천관아터에는 350년 된 소나무가 있다. 21c부여신문

고려 말 문신 이색도 임천과 관련해 시를 남겼다. 홍산 북촌리에 있던 그를 기리는 영당이 홍산관아터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2010년 5월 후손들에 의해 군사리로 옮겨졌다. ‘진경산수’로 유명한 조선의 화가 정선은 ‘임천고암(林川鼓岩)‘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지금의 세도면 반조원리 삼의당 및 나루터가 배경이다.

칠산리에 있는 칠산서원. 장판각 해체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다. 21c부여신문

구교리에는 임천향교가 있고, 칠산리에는 시남 유계를 모신 칠산서원이 있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였던 유계 선생은 명재 윤증의 스승으로 ‘가례원류’를 지었다. 만사리에는 조박, 조성복, 조현소를 모신 퇴수서원이 있다. 두곡리에는 영험이 있다는 선돌이 있는데 관리하는 이가 문을 잠가놓아 볼 수는 없었다.

가신리에는 보광사지가 있다. 보광사는 원명국사가 고려 공민왕의 청으로 공민왕 7년(1358)에 크게 세웠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대보광선사비는 보물 제107호이다. 원명국사가 “비를 세우지 말라”며 세수 65세에 입적하자 6년이 지나 세운 비석이다. 고려 후기의 석비 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 논으로 변해 흔적도 찾기 힘들지만 비문에 따르면 3천명의 승려가 머물렀고 건물이 5백여 칸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보광사는 당시 호서지방 최대의 사찰이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알려진다.

만사리에 있는 삼부토건 조남욱 회장의 공적비. 21c부여신문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기획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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