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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부여를 떠나서는 추억도, 사랑도, 정도 없다”
“내게 부여를 떠나서는 추억도, 사랑도, 정도 없다”
  • 21c부여신문
  • 승인 2011.12.2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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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부여人 - ③ 서울미디어그룹 심상기 회장
-연재를 시작하며-
21세기 부여신문은 제5대 황규산 대표이사 취임을 하면서 제2의 창간 선언과 동시에 부여 출신 향우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하기로 했다. 인물 선정이나 시간 제약·취재일정으로 무순으로 기재하오니 많은 이해를 부탁드린다.

우리 고장 부여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향우들이 많다. 부여가 낳은 언론계의 가장 큰 별인 서울미디어그룹 회장 심상기 향우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재경부여군민회와 부여고등학교 총동창회를 말할 때 ‘심상기’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만큼 심 회장이 재경부여군민회와 부여고등학교 총동창회에 쌓아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고 깊다. ‘부여인’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자랑스러운 향우’이다. 심상기 회장은 특히, 필자에게는 지난 2004년 6월 24일 ‘21세기 부여신문’의 창간호를 발행한 이후 지금까지 7년여 간 단 한순간도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이름이다. 아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이다. 그는 언론계의 대선배이기 때문이다. ‘심상기’ 회장을 인터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이 벅차올라 약속이 잡히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가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편집자 주-


ㅇㅇ 21c부여신문

한국 언론계의 거목으로 기자 출신으로서 가장 성공한 CEO로 꼽혀…
재경부여군민회장 10년·부여고등학교 총동창회장 6년 맡아 봉사하기도


▶먼저 오늘(4월 7일)은 ‘제55회 신문의 날’ 이다. 심 회장은 한국 언론계의 거목이자, 기자 출신으로서 가장 성공한 CEO로 잘 알려져 있다. 언론계에 몸담게 된 동기와 언론계 생활을 회고한다면.

군을 제대하고 대학 4학년 때인 1960년 경향신문에 수습기자로 입사해 그 이듬해부터 정식으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장면 정권(민주당)시대였다. 고향의 ‘부여중앙성결교회’ 목사님을 찾아뵙고 신문기자가 됐다 인사드렸더니 “기자라는 직업이 좋은 것이 아닌데…” 하시며 마뜩치 않아 하셨다. 그 당시 기자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걱정을 하셨던 것 같다.

수습기자 시절에 5.16이 일어났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압박이 서서히 심화됐다. 그런 세월 속에서 사회·정치부를 거치며 3선 개헌 파동, 1979년 박 대통령 서거, 광주민주항쟁 등 대형 사건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1965년 중앙일보가 창간되면서 자리를 옮겼다. 중앙일보에서 정치부장, 편집국장, 출판 담당 상무 등을 역임한 뒤, 1987년 말 중앙일보를 퇴사해 1988년 서울문화사를 창립했다. 그해 8월 여성지 ‘우먼센스’ 창간호를 냈는데 매진되는 돌풍을 일으켰다. 네 번이나 재판 인쇄에 들어가 당시 언론계에 크게 화제가 됐었다. 또 최초의 주간만화 ‘아이큐 점프’ 등을 창간했다.

1990년에는 경항신문 사장을 맡아 2년간 일간지 CEO로 활동했다. 경향신문은 내가 처음으로 기자 생활을 했던 곳이라 애착이 커서 사장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권력이 자꾸 언론을 통제하는 구태가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에서도 이어져 실망을 안고 경향신문 사장직을 물러났다.

그 후 1992년 ‘일요신문’을 재 창간했고, 1999년에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을 인수하게 됐다. ‘일요신문’은 주간지 최초로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됐다. 지금 아마도 주간지가 타블로이드판으로 대세를 이루게 한 원조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이제는 10여개의 언론매체를 거느리고 있는 서울미디어 그룹으로 성장시켰다.(서울미디어그룹은 시사저널·일요신문 말고도 여성지인 우먼센스, 여성패션지인 나일론, 남성패션지 아레나, 육아잡지 베스트베이비, 요리잡지 에센, 생활지인 리빙센스, 아이큐점프·메이폴스토리 등 만화 잡지와 인터넷 회사 등 일간신문과 방송을 제외한 웬만한 언론·출판 분야를 다 망라하고 있는 한국 최대의 출판 전문 그룹이다)

2009년 11월 2일 출판문화사업에 이바지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을 받은 심상기 회장 21c부여신문

▶50여 년 간 언론인 길을 걸어오셨는데 평소 신념이나 언론관이 있다면.

먼저,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공정하고 바른, 정도를 걷는 언론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저널리즘의 기본을 바탕으로 그 길을 가고 싶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예를 들자면 일본의 아사히, 영국의 더 타임즈, 미국의 뉴욕타임즈 같은 신문을 만들고 그 길을 지향하고 싶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언론의 정도를 걷는 길이 결국 언론이 사는 길이다. 나는 평소 ‘정론직필(正論直筆)을 강조해왔다. (심 회장은 일선 언론인으로서만이 아니라, 1981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을 지내며 한국 언론의 발전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했다.

경영인으로서 자리를 잡은 1997년 6월부터 2006년 7월까지 10년 간은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조직위원회(SICAF) 위원장을 맡아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한국 만화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등 한국 만화가 세계로 나아가는 초석을 쌓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유럽에서 크게 주목된 막후에는 심 회장의 이러한 노력이 밑바탕이 되었다.)


▶미디어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나.

종이신문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이 세계적인 흐름이다. 신문기자, 출판업을 해왔기에 이 업계와 관련된 방송 등을 한 번 생각해보고, 또 해보고 싶다.

53살에 서울문화사를 창립해 ‘우먼센스’를 창간할 때 주변에선 망한다고 했지만, 창간호가 네 번이나 인쇄를 하는 기록적인 기적을 일으키며 성공을 이뤘다. ‘일요신문’도 타블로이드판으로 만든 최초의 주간신문이다. 사실상 부도상황에 처해있던 ‘시사저널’도 인수해 정상의 시사주간지로 키워냈다. 미래가 밝지는 않지만 일간지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여전하다.


▶향우들과 동문들 사이에 재경부여군민회와 부여고등학교 총동창회 역사에 심상기라는 이름을 빼면 별로 할 얘기가 없다는 농담을 한다고 들었다. 이처럼 공헌을 많이 한 것으로 아는데.

과찬이다. 후배들의 청을 들어 흩어져 있는 군민회 조직을 재건했다. 1989년부터 1998년까지 만 10년 동안 재경부여군민회장을 했는데 대과 없이 마칠 수 있도록 도와 준 향우들께 깊이 감사하고 있다.

기억나는 일로는 장학재단을 설립했으며, 2년마다 부여인미술전과 한마음체육대회 등을 개최하며 활성화 시켜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군민회로 평가받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또 재경백제산악회와 향우들의 골프친목회인 금성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문인·미술인·언론인 모임 등이 활성화 된 것은 향우들의 친목과 건강, 단합을 위해 기여한 바 크다고 생각한다. 참!(큰 웃음을 지으며) 후임 이만용 회장이 더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아주 기분이 좋다.

감투복이 많아서인지 그 후 부여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6년간 했는데 당시 김학원 국회의원과 함께 모교 강당을 신축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30년, 50년 홈커밍데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동창회와 모교에 대한 사랑운동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고, 서울에 동창회 사무실을 마련하여 지금 큰 자산이 되었다. 친선등반걷기 대회도 시작해 지금도 매년 연례행사로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도 우리 고향 부여와 모교가 더 잘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부여가 더 발전해야 하고, 부여 출신 인사들이 기라성처럼 두각을 나타내 이를 잘 뒷받침하여야만 한다.(심 회장은 창가를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고향과 모교 얘기를 할 때 남다른 감흥을 느낀다는 것이 대화 도중 느껴졌다.)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면.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3년 했는데 당시가 전두환 정권 때였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동아일보 김중배 논설위원 등과 함께 활동하던 시절이다. 군사정권에서 ‘중앙일보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배후에 심상기가 있다’고 말해 정권의 힘에 밀려 쫓겨났다. 그 뒤 출판 담당 상무로 4년을 보냈지만 결국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지금 이렇게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평탄하게만 언론인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 다니며 서너 차례나 얻어터지는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일요신문이 무기 정간을 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혹 정치에는 뜻이 없었나.

사실 젊은 시절에는 있었다. 내가 공교롭게도 정치부 기자 생활을 오래했다. 정치부장을 5년 반 정도 하면서 정치의 뒷면을 너무 많이 봤다. 결정적인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권력의 하수인이 되기 싫어 유혹을 뿌리쳤다.

▶심 회장께 부여는 어떠한 곳인가. 그리고 어릴 적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면 들려 달라.

부여는 내 고향이고 누구보다 애정이 넘친다. 내가 학창 시절 몸이 아주 많이 아팠다. 낚시를 즐겼고 교회도 다녔는데…. 어릴 적 부소산과 백마강변이 너무 좋았다. 정동리 쪽 강과 솔밭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지금도 눈에 밟힌다. 부소산에서 매미 잡던 추억, 백마강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수영하다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생각난다. 나는 살아났지만 뒤에 뛰어든 같은 학년 친구는 끝내 숨졌다. 이처럼 고향 부여는 나를 키워준 곳이다. 내게 부여를 떠나서는 추억도, 사랑도, 정도 없다.

아버님께서 중앙성결교회 최초의 장로이셨는데 교회에서 만난 신앙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여 읍내는 물론 왕포리까지 등불을 들고 다니며 새벽 찬송을 불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일제시대 말기에 부여는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었다. 석목리에서부터 관북리까지의 도로가 경비행장으로 사용됐었다. 부소산 신궁계획도 그때 나왔고…. 며칠 전 고향에 가보니 많이 변해 있었다. 백제의 고도라고 하면서 아직도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았다. 특히, 내가 기독교인이지만 정림사는 하루 빨리 복원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를 떠나 문화유산을 재건하는 일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백제 문화를 살린다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사견이지만 백제역사문화재현단지 바로 코앞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묻고 싶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가 있는 이탈리아나 그리스, 터키 등은 옛 고적과 문화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처럼 옛것을 복원하는 것이 세계적인 흐름인데 이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여는 옛 왕도이다. 백제의 멋을 살려야 한다. 개발을 하더라도 이런 방향으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 왕궁 터를 빨리 찾아야 할 텐데….

심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황 사장도 부여신문 발행인이 됐으니 무엇보다 경영에 매진해야 한다. 또 지역 특성을 잘 살리고 ‘정도’를 걸어가기 바란다. 반드시 성공시켜 더 큰 언론의 길을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며 격려해 주었다.
부여의 이름을 빛내며 언론인이자 경영인으로서 사회에 크게 봉사하는 심상기 회장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것은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지난 2005년 10월 9일 심상기 회장은 이만용 재경부여군민회장과 황우석 박사 생가를 방문해 생가 복원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21c부여신문


심상기(沈相基) : 1936년 12월 11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출생

◈학 력
부여초·중·고교 졸업
1961년 2월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1년 1월 ~ 1965년 8월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1965년 8월 ~ 1987년 12월 중앙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상무이사
1988년 2월 ~ 1990년 8월 (주)서울문화사 대표 ‘우먼센스’, '리빙센스’ , ‘아이큐점프’ 발행

◈경 력
1981년 3월 ~ 1988년 2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1990년 9월 ~ 1991년 12월 경향신문사 사장
1997년 6월 ~ 2006년 7월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조직위원회(SICAF) 위원장
1992년 1월 ~ 2011년 현재 서울미디어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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