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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황신’ 세번째
[탐사기획]‘황신’ 세번째
  • 소종섭
  • 승인 2011.12.26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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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세번째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하여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창간서원 21c부여신문

공주를 지나 부여로 막 접어들면 오른편 산기슭에 서원이 하나 보인다. 홍살문도 있고 제법 규모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부여읍 저석리. 이 서원의 이름은 창강서원(滄江書院)이다. 찾는 이 드물어 마당의 풀도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 서원에 가면 추포 황신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창강서원은 조선 중기 중앙 정계의 서인계 거물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한 서원이다. 1628년(인조 6년) 사부 윤빈, 진사 우극겸 등 수 백인이 건의하고 중앙에서는 신흠, 이정구, 김상용, 김상헌, 김육 등이 관계하여 건립 추진 1년 만인 1629년에 황신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인근에 있던 파평 윤씨들도 서원 건립에 힘을 보탰다. 서인으로서 교류가 있었을 뿐 아니라 윤씨 형제들이 성혼의 외손자였고, 황신이 성혼의 문인이었던 상황 등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강’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건립한 지 54년이 지난 1683년(숙종 8년)이다. 한때는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오갔을 이 서원도 세월의 흐름은 이길 수 없어 고요만이 서원 마당을 맴돌았다. 서원 안에 모셔져 있는 황신 선생의 사진이 그나마 오는 이들을 반겨주었다. 황신(黃愼. 1562년~1617년)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신 가운데 한 명으로 10세 때 부친을 잃어 성혼·이이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조 34년(1601년) 대사헌으로 스승 성혼을 변호해 파면되었다.
ㅇㅇㅇ 21c부여신문

1607년 부여로 이주해 부여와 공주의 경계인 창강에 살면서 정자와 창강서원을 지었다. 창원 황씨들이 부여와 공주의 접경 지역인 분강리와 저석리 일대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황신의 후손인 황상로는 <계묘일기>에서 “부여 분대는 처음부터 우리집이 대대로 거처한 땅이다. 고조 황신은 말년에 창강 뒤쪽 언덕에 정자를 짓고, 이어 그 뒤쪽 언덕 안에 창강서원을 지었다”라고 썼다.

황신은 1582년(선조 15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590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서 정여립의 옥사 때 이조판서 이산해가 정여립을 김제군수로 추천한 것을 논박하여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다시 기용되어 사헌부 지평으로서 서애 유성룡의 천거에 따라 명나라 사신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2년 동안 적진에 있었다.

세자를 따라 남하하여 종사관이 되기도 했다. 중국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왜와 화친을 맺고자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과 함께 가기를 청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황신을 사신으로 뽑았다. 사람들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며 걱정했는데 황신은 의연한 태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본에 도착해서는 적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능욕하고 핍박하였으므로 일행이 겁을 내어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나 황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돌아와서는 전라감사에 제수되었다. 1613년 계축년에 박응서의 옥사가 일어나 정협의 무고로 쫓겨나 웅진에 유배되어 나이 58세로 죽었다. 후사가 없었다. 이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황신은 고금의 서적에 통달했다. 일찍이 세자 책봉을 청하는 표문을 지으면서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려고 지성스레 명하였다. 일은 반드시 기다림이 있은 후에 그리 되는 것이니 우선은 천천히 하라고 할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세상에서 절묘한 글이라고 평했다.

부여의 황신 집안은 황대수(황신의 부친·공조정랑 지냄)-황신-황일호-황윤 등 4대에 걸쳐 문과에 합격해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명문가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란에 걸쳐 공신을 배출했는데 이처럼 대를 이어 문과 급제자와 고관을 배출한 가문은 조선시대에 흔치 않다.

후사없이 죽은 황신에게 입양된 아들 황일호는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의열사에 배향되어 있다. 황일호의 셋째 아들인 황진은 송시열과 송준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학행이 널리 알려져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필자 / 소종섭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21c부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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