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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계백장군 동상, 이대로 좋은가(상)
특별기획- 계백장군 동상, 이대로 좋은가(상)
  • 소종섭
  • 승인 2013.07.31 1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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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최초 계백장군 동상 등록문화재 추진 중, 동상 보유한 구자곡초등학교 “넘겨주기 힘들다”
계백장군은 부여의 상징이다. 그는 부여 충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충신의 사표이다. 어두운 밤에도 별처럼 빛나는 정신의 소유자이다. 역사상 수많은 영웅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충절과 지략, 용맹에 빛나는 장군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부여가 소홀한 사이 인근 논산은 계백을 브랜드화 했다. 대표성을 논산이 가져가는 흐름이다. 계백장군 유적지 관리사업소를 만들었다. 계백장군 동상도 두 기나 갖고 있다. ‘傳 계백장군묘’는 어느새 ‘계백장군묘’로 바뀌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백제문화제 기간 중에는 황산벌전투 재현 행사를 하며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부여는 지금 계백장군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된다. 관광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다. 필자가 늘 강조했듯이 그것은 정신의 문제이고 역사의 문제이다. 부여야말로 핏줄로 보나 정신으로 보나 장군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31일은 최초의 계백장군 동상이 부여에 세워진 지 47년 되는 날이다. 이를 계기로 2회에 걸쳐 계백장군과 관련한 글을 싣는다. 이번 호에는 ‘최초 계백장군 동상의 행방과 그 이후’, 다음 호에는 ‘계백프로젝트’이다. 독자들이 관심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여에 세워졌던 최초의 계백장군 동상은 지금 논산 구자곡초등학교에 있다. 21c부여신문

1966년 7월 31일, 우리나라 최초의 기마 동상이 부여에 세워졌다. 백제의 정신을 상징하는 계백장군의 동상이었다. 동상기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썼는데 지금 읽어도 명문이다.

‘아름다운 땅은 거룩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한층 향기롭다. 이곳 부여는 백제의 옛 서울 사비성이요, 계백장군은 백제의 역사를 최후로 빛낸 큰 충신이다. 나당연합군 십팔만명이 물밀듯 백제로 쳐들어왔을 때 장군은 겨우 오천 군사로 황산벌에 대결했다. 처음 네 차례나 적을 물리쳤으나 오천의 적은 군사로 십팔만 대병을 끝까지 당해 낼 수 없었다. 슬프다. 살은 다 하고 칼은 부러져 장군은 마지막 붉은 피를 장엄하게 황산벌에 뿌렸다. 일월과 함께 천고에 빛나는 장군의 충혼을 젊은이들과 함께 추모하면서 역사 깊은 이 땅에 삼가 동상을 세운다. 서기 1966년 7월 31일 김종필’

ㄴ 21c부여신문

오른손에 창을 움켜쥐고 역동적으로 내딛는 말에 올라탄 계백장군의 기상이 형형한 이 동상은 제작 당시부터 화제였다. 당시 계백장군동상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종필)는 총공사비 4백만원(1백만원은 군비)을 들여 1965년 10월9일 기공식을 갖고 10개월 만에 준공식을 했다.

육군 제2 훈련소 합주단이 연주하고 부여여고생들이 부른 ‘말하라, 동포들아. 우리의 비원 지금도 숙명인양 안고 사느뇨…’라는 ‘계백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작된 제막식에는 군민 3천여 명이 모였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김종필 의원의 힘을 보여주듯 김용태 인태식 육인수 양순직 김성진 이영진 예춘호 정해성 이동진 의원 등 국회의원들도 대거 참석했다.

동상 글씨를 쓴 원곡 김기승(서예가), 글을 지은 월탄 박종화(소설가), 동상을 만든 윤석창(조각가), 각종 자료를 제공한 연재 홍사준(초대 국립부여박물관장) 등 네 명은 감사장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부여인들이 기억하는 이 동상은 지금 부여에 없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에 있는 구자곡초등학교에 있다. 제작 당시 전국 뉴스에 보도되었을 정도로 주목되었던 이 동상은 왜, 어떻게, 부여를 떠나 논산으로 간 것일까.

현재 부여군청 로타리에 있는 계백장군의 동상. 21c부여신문

현재 부여에 세워져 있는 계백장군 동상은 1979년 10월 15일, 당시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김세중 씨가 만든 것이다. 왜 최초 동상 대신 새로운 동상을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지만 정확한 경위는 지금껏 밝혀진 바가 없다.

주변에 고층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동상이 왜소해 보여 새로 건립했다는 설, 오래되어 풍화가 진행되어 보기에 안 좋아 바꾸게 되었다는 설, 패장 계백의 동상이 승자인 김유신의 동상보다 더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이 압력을 행사하는 등 정치적인 이유로 교체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왜소해 보여 새로 만들었다는 설은 지금 서 있는 동상도 최초 동상과 크기, 높이 등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지 않다. 풍화가 진행되어 바꿨다는 얘기도 구자곡초등학교에 지금까지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분명한 것은 첫째, 부여인들 중 왜 최초의 동상이 교체되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다는 점이다. 그만큼 동상이 바뀌는 과정에는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향후 추가적인 취재가 필요하다.

둘째, 최초 동상에 비해 나중에 세워진 지금의 동상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조형적인 측면에서의 완성도는 나을지 몰라도 동상 자체가 뿜어내는 기상은 최초 동상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최초 동상은 역동적인 말의 동작이나 삼지창을 든 장군의 형형한 눈빛이 살아 있었다. 말 꼬리도 달리는 상황을 가정해 만들어 움직임이 살아 있다.

필자는 외산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1978년에 처음 부여를 구경했다. 다른 풍경들은 희미하지만 창을 높이 치켜든 계백장군의 동상은 기억에 콱 박혔다.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이다. 자랑스러움과 함께 저런 분을 본받아야겠다는 강한 열망을 가슴에 심어주었던 동상이었다.

반면 지금의 동상은 어떠한가. 오른손을 든 장군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항복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처자식을 베고 결전장에 나가는 비장함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말꼬리도 밑으로 처져 있어 달리는 말의 형상이 아니다. 말 다리의 모양도 산책하는 말 모양이지 역동적인 모습이 아니다.

필자는 현재의 동상을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살펴보았다. 혹시 방향을 달리 해서 보면 느낌이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저 동상은 장군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부여의 기상을 살리기 위해서는 현재의 동상을 바꾸든가 최초 동상을 옮겨와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 계백장군 동상을 제작한 윤석창 선생. 21c부여신문

최초의 계백장군 동상을 만든 이는 당시 백제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던 윤석창 씨다. 청양군 장평면 분향리에서 1936년 5월 2일 태어난 그는 1975년 40세로 사망했다. 20대 때부터 그를 괴롭히던 신장 관계 질환이 목숨을 앗아갔다.

계백장군 동상을 만들었을 때 그의 나이는 30세. 그러나 당시 그는 충남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유명 조각가였다. 철도고를 나와 서라벌 예술대학을 졸업했다. 홍익대 미대에 편입학 했으나 자퇴했다. 백제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대전 중앙중학교로 옮겨 간 그는 그곳에서 강의 중 죽음을 맞았다. 학교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묘소는 부여 자왕리에 있다.

그가 남긴 당시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계백장군 동상을 만들기 위해 상당한 공부와 답사를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활, 창, 안장, 의상, 갑주 등을 일일이 고증했다. 고구려 벽화 등에 나와 있는 기마도 등도 연구했다. 권위자였던 동국대 황수영 교수로부터 갑주에 대한 자문을 받은 기록도 남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정기 고고과장과 김근배 국립공주박물관장으로부터 5~7세기 마구와 환도, 마구 장식 위치 등에 대해 자문을 받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장으로부터는 고대 무사들의 전투 광경에 대해서도 들었다. 홍사준 국립부여박물관장은 백제시대의 인동문에 대해 자문했다. 직접 승마장을 찾아 말들의 운동법과 움직임을 살핀 적도 있다.

최초 계백장군 동상은 1979년 부여에서 철거-연무대 톨게이트 방치-1983년 구자곡초등학교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9년 10월 새 동상이 만들어진 뒤 최초 계백장군 동상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부여 밖으로 보내진다.

지난 4월 필자는 계백장군 동상과 관련해 고 윤석창 선생의 아들인 윤여송 씨를 만났다. 공학 박사인 그는 한 대기업 계열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한이 많았다. 그의 설명이다.

“나는 1981년 결혼했다. 이듬해 성묘 차 부여에 갔다가 동상이 없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 군청에 갔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더라. 나이 많은 경비가 알지 모른다고 해 그에게 가서 물으니 ‘논산으로 갔다’고 했다. 그래서 논산군청으로 가 물으니 ‘온 것 같은 데 잘 모르겠다. 연무대 톨게이트 어디선가 봤다는 사람이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톨게이트에 가 도로공사 측에 물으니 ‘뒤편 공터에 1년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구자곡초등학교로 옮겼다’고 했다. 구자곡초등학교에 가보니 있었다. ‘부여로 옮겨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성묘하러 갈 때 아이들 데리고 가서 ‘이 동상이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다’라고 얘기해 주곤 했다.”

최초 동상이 왜 부여에서 연무대 톨게이트 공터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누군가 지시를 했을 테고 옮긴 사람이 있을 텐데 증언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구자곡초등학교 19회 동문들이 동상 기단에 새겨 넣은 표지석. 21c부여신문

연무대 톨게이트에 버려져 있던 동상을 발견해 구자곡초등학교로 옮긴 이는 구자곡초등학교 19회 동문들이다. 송두현 동문 등이 가치를 인식해 자비를 들여 옮기고 보수했다. ‘장군의 충성심을 본받아 우리 조국과 민족을 길이 지켜 나아가자’라는 글귀와 함께 19회 동문 2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1983년 6월 6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 최초 계백장군 동상 기단부에 붙어 있던 ‘계백장군상’과 ‘동상기’ ‘사적기’는 윤준웅 전 부여문화원장이 사비로 구입해 보관하고 있다. 부여에서 논산으로 옮겨질 때 동상과 이들이 따로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업을 하는 김아무개 회장이 1986년 당시 550만원에 인사동 골동상으로부터 구입한 것을 윤 전 원장이 알고 되샀다. 윤 전 원장은 “최초 동상이 부여로 돌아온다면 기증할 용의가 있다”라고 말했다.

ㄴ 21c부여신문

필자는 지난 4월초 구자곡초등학교를 찾았다. 최초 계백장군 동상을 부여로 옮겨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관계자들을 만나기 전 살펴보니 구자곡초등학교 역대 졸업생들이 하나 같이 계백장군 동상을 배경으로 찍은 졸업 기념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구자곡초등학교 졸업생이다.

구자곡초등학교 졸업생들의 졸업 사진. 최초 계백장군 동상을 배경으로 찍었다. 21c부여신문

구자곡초등학교 동문들에게 계백장군 동상은 이미 하나의 중요한 상징물이 되어 있었다. 김종만 구자곡초등학교 교장과 관계자들은 “논산시에서 백제군사박물관을 만들 때 상징 조형물이 필요하다며 계백장군 동상을 그곳으로 옮기자고 여러 차례 찾아 왔었다. 내부에서 심각하게 검토해 안 된다고 통보했다. 동문들의 애정이 큰 상징물이어서 지역사회, 학부모, 학교 등이 모두 동의하지 않는 이상 이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논산시에서 요구해도 안 되는데 부여에서 요구한다면 더 어려울 것이다. 부여군청에서도 지난해 사람이 찾아왔을 때 이런 얘기를 다 해줬다. 부여에서 버린 것을 우리 동문들이 자기 돈을 써가며 살린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현 단계에서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초 계백장군 동상을 부여로 다시 이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논산시는 이미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최초 기마동상이고 작품성과 역사성이 있는 만큼 지정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구자곡초등학교 교사·동문·학부모들이 반대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들이 허락한다고 해도 논산시가 반대하면 일이 꼬인다. 논산시는 3천만원을 들여 구자곡초등학교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을 보수했다.

논산 백제군사박물관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 21c부여신문

연무읍 측에서는 “육군훈련소로 옮기고 등록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을 추진하겠다”라는 입장이다. 유족들이 반드시 부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윤여송 씨는 “백제군사박물관이나 부여, 논산로타리 등 어디든 공개된 곳으로 옮겼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논산 사람들이 최초 계백장군 동상에 쏟은 관심보다 부여인들의 정성이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실로 안타깝고 가슴이 미어질 일이다.

소종섭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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