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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⑪ 충화면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⑪ 충화면
  • 소종섭
  • 승인 2013.08.28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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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연재 순서
①외산면 ②규암면 ③초촌면 ④장암면 ⑤홍산면
⑥양화면 ⑦구룡면 ⑧내산면 ⑨석성면 ⑩임천면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충화면은 1914년에 팔충과 가화의 이름 가운데 충과 화자를 따서 생긴 면이다. 원래 태종 13년(1413년)에는 임천군에 속하고 팔충면이라고 했다. 고종 32년(1895년)에는 가화면 8개 동리를 합쳐 팔가면이라고 했다. 1914년에 그런 역사성을 살려 행정구역을 바꿀 때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구성 비율이 전체 1322명 가운데 40.8%인 542명에 달하는 초고령 지역이다.

가화리에 있는 서동요 테마파크. 왼쪽 건물은 현재 공사 중인 청소년수련원 건물이다. 21c부여신문

충화면은 계백장군의 혼과 정신이 깃든 곳이다. 지난 번 부여신문에도 썼지만 장군의 본향인 부여가 계백장군을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근 논산에 밀리는 형국이다. 논산은 주민과 지자체가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 근거가 불분명한 묘역을 계백장군 무덤으로 인정 받아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그 무덤을 발견한 사람 또한 백제사적연구회를 이끌던 부여 사람 故 홍사준 선생이었다.

부여는 계백장군이 태어난 충화면에 장군과 관련한 여러 전설과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장군의 흔적과 전설들은 파편화 되어 있고 제대로 알리고 전승하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동상, 팔충사, 오천결사대상 등 장군과 관련한 건물이나 조각품들도 유기적인 관계 속에 배치되어 있지 않고 저마다 따로 따로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계백장군 정신을 기리는 작업을 종합적으로 구체화 해야 한다.

천당2리 표뜸마을 입구. 21c부여신문

지난 24일 오후 천당2리 표뜸마을에 들렀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 유래를 기록한 석비, 천단소개기 등이 세워져 있어 보통 마을과 다른 느낌을 주었다. 마을 안에는 322년 된 7m 높이의 느티나무가 중심을 잡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천등산(261m)에서 떠내려 왔다는 돌기둥을 옮겨다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송기선 이장은 표뜸마을 앞 논을 가리키며 “원래 이곳에 팔충사를 옮기는 등 계백장군 브랜드를 특화하는 명소를 조성하기로 했었는데 예산 문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표뜸마을이라는 이름은 계백장군이 이곳에서 무예를 닦았고 전장에 나가면서 장군이 표석을 남기고 출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계백장군이 무예를 수련한 곳으로 알려진 천등산. 21c부여신문

표뜸마을 바로 앞에 있는 천등산(天燈山)은 계백장군이 태어나 무예를 수련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산이다. 천등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옛날 백제의 궁성(부여)에서 의자왕이 밤마다 서편 하늘에 매달린 듯이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이상하다고 여기다가 하루는 신하들을 보내 살피고 오도록 했다. 신하들이 말을 달려 이곳 천등산에 이르러 등불이 반짝이는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갔을 때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건장하고 잘 생긴 장사 한 사람이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를 옆에 데리고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의자왕은 곧 이 장사를 불러들여 장군으로 삼았으니 이가 바로 계백장군이다. 의자왕은 이후 하늘에 등불이 매달린 듯 보였다는 연유로 해서 이 산에 천등산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천당리에서 청남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백제의 충신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이라고 해서 ‘백충재’라고 불렀다. 이 고갯길과 관련해서도 계백장군의 전설이 전한다. ‘계백장군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술 공부를 하도록 과제를 주었다. 백충재에서 천등산 마루의 과녁을 향해 활을 쏘고 그 화살보다 빨리 달려가서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에야 조정에 나아가 벼슬길에 오르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어머니의 명에 따라 매일 같이 활쏘기를 연습하며 재빨리 말을 몰아 천등산에 올랐으나 화살보다 빨리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장군의 말을 물어죽이고 자기 등에 타라고 했다. 계백장군은 이 호랑이의 등에 앉아 과녁을 향해 활을 쏘니 호랑이는 순식간에 달려 과녁에 이르렀다. 그 후에 화살이 날아와 과녁에 꽂혔다.’

계백약수, 일명 백충대 우물. 계백장군이 마셨다는 우물이다. 21c부여신문

천등산은 보기에 높은 산은 아니다. 그러나 길은 가팔랐다. 포장된 길을 따라 걷는데 순식간에 땀이 쏟아졌다. 비 온 뒤라서인지 풀이 제법 자라 있었다. 정상 가까이 가니 우물이 보였다. 계백약수 일명 백충대 우물이다.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명 백충대 내지 천등산 건물지 우물로 불리는 이곳은 계백장군의 어머니가 유복자인 장군을 출산할 때 난산으로 실신하자 호랑이가 이곳 우물 근처 석실로 물어와 젖을 먹여 키웠다는 전설이 고문헌을 통해 전해진다. 계백장군이 천등산에서 무예를 수련하면서 이곳의 물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계백이 왕의 부름을 받고 출사할 때 자신이 마셨던 우물이라는 증표로 돌을 우물에 넣어 표시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천등산 정상에 있는 천단. 2009년에 만들었다. 백제문화제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한다. 21c부여신문

천등산 정상에는 천단이 있다. 2009년 4월에 만들었는데 백제문화제 때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니 주변 산들이 옹기종기 제 자랑을 하고 있었다. 부여읍 일대와 멀리 금강 하구까지 보였다. 천등산에는 계백장군의 발자국이라고 전하는 발자국 바위도 있다. 인근 팔충리는 계백 성충 흥수 등 백제의 8충신이 태어난 곳이다.

계백 성충 흥수 복신 도침 등 백제의 8충신을 모신 팔충사. 21c부여신문

지석리에는 팔충사가 있다. 계백 성충 흥수 복신 도침 혜오화상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 여덟 명의 충신과 5천 결사대를 모신 사당이다. 1980년 부소산에 있던 삼충사 옛 건물을 주민들이 옮겨와 지었다. 해마다 백제문화제 때 팔충제를 지낸다. 찾는 이 드물어 잡초는 무성하고 문은 굳게 닫혀 있어 마음이 무거웠다.

지석리에 있는 학음정. 21c부여신문

지석리에는 고인돌도 있다. 백제시대에 계백장군을 비롯한 충신들이 지석묘 앞에서 모여 결의를 다지고 나라를 살릴 각오를 새롭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지석리에는 또 1922년에 지은 학음정이 있다. 김영한이 지은 ‘학음정기’에는 ‘옛날 신암공(신암 송윤선 1632∼1702)께서 가림의 산중에서 독서를 하시니 마을 사람들이 그 거처를 일러 ‘독서동(讀書洞)’이라 하였다. 신암이 독서를 하려는데 마침 쌍학이 날아와 마을의 서쪽 바위 위에서 춤을 추었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다시 그 바위를 일러 마학암(摩鶴巖)이라 하였다. 뒤의 바위가 새가 날개짓 하는 모습 같다 하여 중부(中孚)의 말에서 따다가 학음정이라 편액을 걸었다.’ 정자 옆에는 서곽(西郭) 송상인(宋象仁)과 신암(愼菴) 송윤선(宋胤先 1632∼1702)을 제향하는 세양영당(世陽影堂)이 있다.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오덕사. 21c부여신문

오덕사에는 선조대왕 태실비가 있다. 21c부여신문

오덕리에는 신라 경덕왕 때 원효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오덕사 있다. 백일홍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오덕사에는 또 선조대왕 태실비가 세워져 있다. 1570년(선조 3년)에 이곳에 선조대왕의 태함을 안치하면서 세운 비이다. 글자가 마모되면서 1747년 영조 23년에 다시 세웠다. 거북이 모양의 귀부가 인상적이었다. 만지리에는 문화류씨 5대파 중의 하나인 지후사공파 종중의 묘소가 있다.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기획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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