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자유인이 되는 길
[독자기고] 자유인이 되는 길
  • 박철신
  • 승인 2013.09.25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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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의 최고 가치는 ‘지금’이라고 했다.

그럼 ‘지금’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처럼 필름 한장 한장의 연속성이 형태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마치 점들이 이어져 선이 되는 것처럼 자신을 포함한 우주만물은 찰라 찰라 계속 변해가는 모습들의 연속이다.

거울에 비춰진 어제의 내 모습과 오늘의 내 모습은 별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추억의 사진첩을 펼쳐보면 10년 전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은 큰 차이를 보인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별개의 다른 사람인 것이다. 즉 1초 전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이 순간만이 ‘나’일 뿐이다.

지금의 ‘나’ 또한 순간순간 변해가며 존재하는 것이니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나’는 변해간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또 다른 ‘나’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中道)이다.이처럼 계속되는 변화의 흐름만 있는 것이니 ‘나’라는 것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한 번 살고나면 끝이라는 생각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오직 ‘지금’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땅물불바람)의 4대가 잠시 인(因·직접적인 원인)과 연(緣·간적접인 원인)에 의해 모아져서 (중·衆), 생겨난 것 (생·生)이니 깨치지 못하고 생과 사를 반복하는 사람을 중생(衆生)이라 부른다.

우리가 밟고 다니며 곡물을 재배하는 이 땅은 인간, 동물, 식물 등의 몸체가 흩어져 생겨난 것이고, 우리는 우리 육신의 고향인 지수화풍 4대에서 나와서 다시 4대 속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한다. 따라서 나와 남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다.

뒤집어 쓴 육체가 똑같은 지수화풍에서 온 것이니 동체대비(同體大悲)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교육되어지고 세뇌되어진 인간이 만든 법칙(유위법·有爲法)을 비워내야 세상의 이치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마음을 내는 이것은 선과 악의 과보와 인연에 따라 티끌들의 일시적인 조합으로 형성된 것이니 지금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나’라고 일컫는 이 ‘마음’은 존재의 한 구성요소일 뿐 ‘나’를 총괄하는 주체는 아니다. 즉 내 몸의 주인은 따로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특별하고 우월한 자아(ego)는 따로 없는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이 인연의 법칙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짐을 반복하는 것이니 선과 악의 결정체만이 전생에 내가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영(靈)의 상태에서 그저 허공에 머무르다가 또다시 시절 인연이 맞으면 사람이나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시 태어난다.

지금 생각을 내고 있는 이 마음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그 마음이란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방편으로 이름 지어진 표식일 뿐 나의 본질은 아니다. 따라서 마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

세상은 우주만물의 이치대로 그저 쉼없이 변화해 가는 것 일뿐 자연과 이 세상은 인간들을 따로 봐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자연의 이치는 그저 무미(無味)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에 취해 눈을 감은 상태로 험난한 인생길을 가고 있으니 그저 답답하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다. 남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면 사람이 아무 마음도 내지 않는 무심한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다. 전생을 알고 싶은가? 그럼 이생에서 내가 받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은 후의 후생이 어떨까 궁금한가?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면 그 답이 나온다.

다만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사람을 시원하게 해줬다는 생각을 갖지도 않고 그런 마음을 나타내지도 않는 것처럼 우리들도 남을 돕게 될 때 상(相·남을 도와줬다는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그 마음을 낸다면 (무주상·無住相) 훗날 큰 복덕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은 복도 현생과 후생을 거쳐 모두 소멸되면 더 이상 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니 이 또한 허망하다. 복 받는 것과 깨달음(해탈, 열반)을 얻는 것은 별개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나고 죽음을 겪지 않게 되는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참회하고 참선하라.

ㅇ 21c부여신문

박 철 신
충남의사협회 부회장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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