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어릿광대의 애환(哀歡)
[목요광장] 어릿광대의 애환(哀歡)
  • 이규원
  • 승인 2013.09.30 1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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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체험5>

1983년 2월부터 공보계장 2년 7개월 동안 고란사를 찾는 중앙과 지방기자 안내와 보도자료 제공이 일상 업무이고 제5공화국 정착기에 밀려오는 국정홍보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 시절엔 취재지원 예산 한 푼 없었고 부정적인 보도 되었을 때마다 군수실 불려가 해명하는 부담때문에 군청 35개 계장자리 중 기피 1호 자리였다.

내가 겪은 3명의 군수 언론관(言論觀)이 각기 달라 흥미로웠다. 비판기사 크게 났을 때 조종완 군수는 해명을 받는 대신 기사 쓴 기자한테 대들지 말라며 오히려 고생한다 위로하였고, 이정우 군수는 새벽이라도 전화하여 귀청 떨어지게 조진 후 출근해서 미안했다고 하였으며. 정경택 군수는 못 본 척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보도한 기자까지 불안케 하였다.

대전일보 최재성 기자는 홍보기사를 자주 써주는 대신 현장을 뒤지고 다녀 애를 먹였다. 호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 남지 않을 때까지 밤새 마셔도 취하지 않는 주량 때문에 소주 반병 주량으로는 내공이 필요했다.

1984년 9월 어느 날 KBS 김애란 부여중계소 아나운서가 공보실 모르게 군수실 들어가 KBS본사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MC위키리)’과 ‘출발동서남북(MC이상룡)’ 촬영일정을 결정해 버려서 크게 다투고 ‘촬영지원 안 하고 보도자료까지 중단한다’고 선전포고 한 3일 만에 사과하여 다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연합통신 임병고 기자는 문화재 전문가여서 특종이 많았고 문화재관리국의 개선정책이 되기도 하였다. KBS와 MBC 취재팀의 향토사학자 인터뷰 요청 때마다 얼굴 빌려주어 고마웠다.

1984년 10월 5공화국 실세 이진희 문화공보부장관이 방문하여 만찬행사를 하였는데 행사 후 장관이 수행비서까지 따돌리고 사라졌다 2시간 만에 불쑥 나타나 여관(부림장)방 문 걸어 잠가버려 베게 들고 문밖에서 덜덜 떠는 문화재관리국 관계자들의 보기드믄 그림을 보아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만찬장 분위기가 토속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 표출이었다.

1984년 제30회 백제문화제 부속행사로 ‘향토문화수예품전시회’를 ‘정수예점’의 주관으로 개최할 때 행사 전단(傳單)에 군수의 인사말이 들어가게 되어 아래와 같이 결재 올렸다.

展示會 招待말씀

百濟의 後裔(후예)들은
文化와 藝術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傳統文化를
뛰어난 叡智(예지)로 간직하고
創造하는 마음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요

여기
제30회 百濟文化祭에 즈음하여
오직 손끝의 精誠으로만
엮어낸
鄕土文化 手藝品 展示會가

百濟의 얼을
再現케 하는
또 하나의 契機(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여군수 이정우


군수는 쳐다보자마자 결재판을 내던지며 ‘이게 무슨 인사말이냐’고 소리칠 때 바닥에 흩어진 서류 챙기면서 ‘좁은 지면에 상투적인 연설조보다 예술행사와 어울리는 시어조(詩語調)가 좋을 것 같았다고’ 설명하자 군수는 다시 보자며 찬찬히 읽어 보더니 ‘이대로 하라’고 하며 결재판 던졌던 것 미안하다고 하였다.

3년 가까이 기자들의 취재 창구역할 하려면 주요 군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폭넓은 업무지식을 얻게 되어 유익하였다. 그러나 선배들에게는 6개월 또는 1년이면 어김없이 교체해주었던 것과 비교 되어 소외감(疏外感)이 들기 시작하였다.

ㅇ 21c부여신문

이 규 원
전 부여군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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