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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⑮ 부여읍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⑮ 부여읍
  • 소종섭
  • 승인 2013.10.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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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순서
①외산면 ②규암면 ③초촌면 ④장암면 ⑤홍산면 ⑥양화면 ⑦구룡면
⑧내산면 ⑨석성면 ⑩임천면 ⑪충화면 ⑫남면·옥산면 ⑬은산면 ⑭세도면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인구도 다르지만 마을마다 각각 특색이 있다. 우리는 같은 부여군에 살면서도 다른 읍면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볼거리, 먹거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사랑이 있어야 보인다.

필자는 평소 우리 고장의 인물과 역사,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거기에서부터 지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백제의 도읍지로서 찬란한 역사,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부여는 부여다운, 부여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활용을 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이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도시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부여는 이런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 유리한 점이 많다. 이번 기획이 부여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외산면을 시작으로 각 읍면별로 특색 있는 테마를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부여 역사 인물 알기’ 기획에 이은 문화유산, 인물,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부여 마을 알기’ 기획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새로운 특화 전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부여읍 전경. 21c부여신문

부여읍은 사비백제 시대의 중심지였다. 구드래 항구를 통해서 수시로 무역선이 오가는 국제화 된 도시였다. 찬란한 왕궁과 계획된 도시 시설, 수준 높은 문화의 집산지였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288호 창왕명석조사리감, 보물 제194호인 부여석조 그리고 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 석탑 등 14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은 사비백제 시대의 진짜 유물들이 부여읍에 있다.

관북리 일원을 중심으로 한 옛 백제의 왕궁터로 예상되는 문화유적들, 산성이자 왕궁의 후원 기능을 했던 부소산에 있는 군창지와 낙화암, 조룡대,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스며 있는 궁남지, 능산리 백제왕릉원 등에서도 우리는 백제를 읽는다. 부여읍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런 부분은 제외하고 조금 덜 알려진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

부여읍은 부여의 중심이다. 지금이야 임천, 석성, 홍산까지 다 포괄하고 있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부여는 지금의 부여읍, 규암면 일원에 불과했다. 1914년 임천군, 석성군, 홍산군을 통폐합 하면서 현재 부여군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궁남지 전경. 21c부여신문

성왕이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백제의 수도를 옮기면서 국호를‘남부여’라고 칭했지만 부여가 행정구역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742-764) 들어와서이다. 경덕왕은 군현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이때 ‘소부리(사비)’가 ‘부여’가 됐다. 대략 751년 쯤이다.‘부여’라는 이름의 나이가 13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지명은 우리나라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다. 부여의 유구한 역사성은 이런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부여읍 땅은 백제시대에 습지대였다. 쓸모없는 땅이 오랜 기간(학자들은 보통 16년으로 본다.)의 계획·공사를 거쳐 백제국의 수도로 거듭난 것이다. 물을 빼내기 위해 대규모 관개·수로 시설이 요구됐다.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연못도 파야 했다. 대규모 건물 등을 짓기 위해서 이른바 ‘판축기법(흙을 다지고 그 위에 다시 흙을 쌓아 또 다지는 건축기법)’을 썼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버텨 온 것은 이런 건축기법에 힘입은 바 크다.

의열사. 21c부여신문

부여읍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은 동남리에 있는 의열사이다. 의열사는 조선 선조 때인 1575년 당시 부여현감이던 홍가신이 세웠다. 처음에는 용정리에 세웠는데 이름을 현의사라고 했다. 율곡 이이가 지은 이름이다. 3년 뒤 선조로부터 의열사라고 사액을 받아 이름을 바꿨다.

의열사는 부여에 세워진 최초의 사우이다. 백제-고려-조선 등 삼조에 걸친 충신들을 모신 곳이라는 정신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이곳에는 백제시대 충신인 계백 성충 흥수와 고려시대 충신인 이존오 그리고 조선시대 충신인 정택뢰 황일호 등 여섯 분을 모셨다. 1970년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 의열사와 관련한 자세한 기록은 필자가 지난해 펴낸 책 <백제의 혼 부여의 얼>에 실려 있으니 참고 바란다.

삼충사 터는 일제가 부여신궁을 만들던 곳이었다. 21c부여신문

부소산에 있는 삼충사에도 계백 성충 흥수의 삼충신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 있는 영정이 이들 충신들의 표준영정이다. 국가가 공인한 영정이라는 뜻이다. 부여 출신으로 중앙대 부총장을 지낸 산동 오태학 씨가 그렸다. 삼충사는 이들 삼충신 외에 터 자체가 갖고 있는 역사성이 남다르다. 이곳이 바로 일제가 건립하려 했던 신궁터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부여에 신궁을 건립해 일본인의 시조라는 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天照大神)를 한국인의 시조로 믿게 하고 참배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부여신궁 계획을 설립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미나미지로 당시 조선총독(1936-1942)이었다. 그는 부여에 세우는 조선신궁을 조선인뿐만 아니라 전체 ‘대동아공영권’ 주민의 정신적 메카로 삼으려 했다.

이 때문에 그가 부여에 세우려 했던 신궁은 서울 남산에 세웠던 신궁보다 격이 높은 신궁이었다. 일본의 명치신궁과 동격인 신궁을 부여에 세우려 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일본 천황은 1939년 7월 31일 직접 조선신궁 건립 계획을 발표한다. 일제는 1938년 말부터 부여를 내선일체의 성지로 만든다는 미명 아래 신궁 건설 계획과는 별개로 10만원을 들여 부여에 대규모 중견청년수련소를 설치하는 계획을 추진한다.

총독부 학무국장이 소장을 맡았는데 1기생은 소학교 교원 50명이 수료했다. 신궁을 만들기 위한 6만5천평 규모의 광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파괴되었다. 신궁 건설이 본격화 되자 부여에는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어 닥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기까지 계속됐던 부여신궁 건설 공사는 80% 정도의 공정율을 보인 상태에서 부여청년동맹원에 의해 파괴되었다. 신궁을 만들려던 자리에 1957년 백제의 충신들을 모신 사당인 삼충사를 세웠다.

부여읍의 마을 이름들도 이런저런 유래가 있다. 부소산 아래 관북리는 마을 전체가 옛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발굴을 위해 상가 이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었던 곳의 북쪽이라 하여 관북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1916년 국보 제196호인 금동석가여래삼존입상과 사택지적비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부여읍 관북리 상가 철거. 21c부여신문

구아리는 군청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쌍북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쌍구리와 북포리의 이름 한 자씩을 따 생겼다. 쌍북리에는 역사학자인 이이화 선생의 부친으로 주역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야산 이달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한때 그는 부여에 머물려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구교리는 부여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동남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산리와 남산리에서 이름을 땄다. 동남리에는 4월 혁명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 신동엽 선생의 생가가 있다.

신동엽 생가. 21c부여신문

군수리는 백제 때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이라는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 백제시대에는 꽃다운 여성들이 아리따운 옷차림을 하고 이곳을 왕래했다고 해서 꽃정 또는 꽃노들이라고 불렸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낸 한국불교계의 큰 별이었던 월하 스님이 군수리에서 났다. 금동미륵보살입상과 연화문와당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된 군수리사지가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탑리는 가속리와 탑리의 이름을 따서, 왕포리는 대왕리와 구포의 이름을 따서, 중정리는 중리와 구정리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중정리 나성 끝에는 치마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염창리는 백제 때 의염창이 있어서 염창리라 불린다. 군돌마을과 관련해서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백제군이 파진산에서 패하고 최후로 나성을 지킬 때 여러 차례 접전에서 패해 군사의 수가 너무 약세이므로 뒷산인 필서봉을 중심으로 군사들을 빙빙 돌도록 하니 신라군이 즉시 침공을 못해 의자왕을 피난케 할 수 있었다. 군사들이 돌던 곳이라 군돌이라 한다.’

현북리는 조선시대 현북면이 있던 곳이라, 능산리는 능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능산리는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 석조사리감의 발견으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시인 신동엽 선생의 묘가 이곳에 있다.

석목리는 석교리, 진목리의 이름을 따, 용정리는 용전리와 석정리에서 이름을 따 지었다. 용정리는 조선시대에 이인찰방에 따른 역이 있던 곳이다. 마을 남쪽 엄방골에 깎은 듯한 바위에 네모진 금이 있는 책바위는 백제가 망하자 중요한 서적을 이곳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부여의 마지막 서당인 이안재(易安齋) 21c부여신문

정동리는 마을에 큰 샘이 있는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정동리에는 ‘이안재(易安齋)’는 부여의 마지막 서당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일부 서책과 현판도 있었다. 자왕리는 주자왕산 아래 마을이 있는 것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송곡리는 송삼리와 대곡리의 이름을 따서, 상금리는 상수락리와 금암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저석리는 저채리와 석탄리의 이름을 따서 생겼다. 저석리는 의열사에 모셔져 있는 고려시대의 충신 석탄 이존오가 귀양 와 살던 곳으로 당시 그가 살던 석탄정터가 전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추포 황신을 모신 창강서원도 저석리에 있다. 신정리도 행정구역 개편 때 신정리와 정곡리에서 따 이름을 지었다.

부여인이 꼭 알아야 할 부여의 마을 이야기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소종섭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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