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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다섯번째
[탐사기획]『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다섯번째
  • 소종섭
  • 승인 2011.10.28 2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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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리 애국지사들’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장하리 애국지사들’
처음에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반응은 “어! 정말요?”였다. 한 마을에서 여섯 명의 애국지사가 나와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니! 그것도 내 고향 부여에 말이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다가 주변의 고향 사람 몇몇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사실을 고향 부여에서도 아는 이가 드물다는 것은... 심지어 현장인 장암면 장하리에 사는 후배도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부여군지>에서도 읽어본 기억이 없었다. 현장의 역사 공부가 필요한 이유가 절실히 느껴졌다.

부여군 남서쪽 금강변에 있는 진주 강씨들의 집성촌인 장암면 장하1리, 일명 ‘장정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오늘 이야기의 무대이다. 원래 임천 남산면 장정리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하곡리와 합병해 이름이 앞글자 하나씩을 따 장하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장정마을’이라 불리는 어원의 유래이다. 원래 진주 강씨들이 100여 호 살았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객지로 떠나 70여 호에 불과하다. 1980년 이후 박사가 16명 배출됐고, 기술사가 한 명 배출됐을 정도로 학구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강석기 사진 21c 부여신문
이 한 마을에서 여섯 명의 애국지사가 배출됐다. 강석기(1862년~1931년), 강철구(1894년~1943년), 강일(1911년~1950년), 강성모(1915년~1940년), 강일구(1910년~1950년), 강병국(1915년~1984년) 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장정마을 입구에는 호석(湖石) 강석기 지사의 비석을 필두로 강일구 선생의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강석기 지사의 비석은 ‘~묘’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마지막 ‘묘’자를 정으로 쪼아 안 보이게 만들어 놓았다. 원래 부여읍 가증리 강지사의 묘지에 있던 비석인데 묘가 현충원으로 옮겨가면서 비석만 이곳에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강일구 선생 추모비’는 ‘덧없는 세월 속에 비운의 시대를 만나 애국 충정의 의지를 꽃피우지 못하고 좌절한 채…’라며 한 시대를 살다간 지사의 넋을 기린다. 지난 2010년 11월 14일 광복 회원들이 세웠고, 비문은 부여여중 교장을 지낸 宜軒 류익렬 선생이 썼다.
장정마을에 진주 강씨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4백여 년 전이다. 강치손이라는 이가 처음 이곳에 낙향하면서 강씨가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장정마을에서 이처럼 애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종교의 거두로 알려진 호석 강석기 선생의 역할이 컸다. 장정마을에 단군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지금도 해마다 10월이면 단군제를 올리는 것이 상징적이다.

강석기 비석. 21c 부여신문

강석기 지사는 일제시대 대종교의 지도자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밝았고 진구, 철구, 용구의 세 아들을 두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1863년~1916년)이 단군 숭배를 기본으로 해서 창시한 우리 고유의 민족 종교이다. 1895년부터 9년간 함경북도 성진, 길주, 경원 등 세 곳의 감리를 역임한 강석기 지사는 대종교를 통해 나라를 구원하고 민족 정신을 선양하고자 1909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당시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기지 가운데 하나였다. 1914년에는 나철을 대신해 백두산 상봉에 올라 혈서를 써 하늘에 고하기도 했다. 1918년에는 교주를 제외하고는 최고위 직책인 사교(司敎)에 임명됐다. <종리문답> <천산도설> <천부경 해설> 등을 지었다.

장정마을에 살고 있는 후손 강상모 씨는 “대종교에서는 강우라고 부르는 등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명을 쓰며 활동한 것으로 안다. 박정양과 일본에 갔을 때는 미루나무를 가져와 3천본을 장하리 일대에 심었다”라고 전했다. 실제 <강씨 사적보감>에도 그의 이름이 ‘강우’라고 나와 있다. 1906년 장정마을에 ‘천영학교’를 건립해 항일사상과 독립의식을 고취했던 강석기 지사는 갈수록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가서 활동했다.
강상모 씨는 “강 지사는 가난한 이들을 북간도로 보내 개간토록 하는 이민정책을 썼다. 북로군정서가 만들어질 때는 총재를 하라는 요구를 사양하며 독립운동가 이시영 등을 영접한 당사자이다. 이시영이 부통령이 된 뒤 강 지사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한때는 총리대신 김홍집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이범석 장군, 김좌진 대종교에 입교할 것을 권한 이도 강 지사였다.

1931년 그가 서거하자 언론들은 ‘대종교 거두의 별세’를 크게 보도했고 인근 강경과 홍산 등지에서 1천여 명의 조문객이 몰려 부여경찰서가 초비상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 정부는 1982년 4월 14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강철구(호 해산) 지사는 강석기 지사의 둘째 아들이다. 국립대전현충원 제1묘역 334기에 안장되어 있는데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열사께서는 항일단체이며 국조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교도로서 만주에서 민족 교육에 열정을 바치시고 특히, 북로군정서에 소속, 군자금을 모집 중 피체 되어 옥고를 치르시다 출옥 후 다시 만주에 가시어 항일 운동과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시던 중 재만(在滿) 독립운동의 거물로 지목 받아 체포되어 옥사 순국하시다. 님이여, 광복된 조국의 품 안에서 이제 편히 쉬소서.’
1920년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의 비서로 독립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던 그는 1923년 징역 3년형의 옥고를 치른다. 1922년 임시정부의 공채 3만5천원을 갖고 입국해 동지들을 포섭하며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던 중에 체포된 것이다. 1943년 조국 광복을 불과 2년 앞두고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 해 10월 21일 목단강성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강철구 지사는 대종교에서 말하는 임오교변에서 순교한 ‘임오10현’의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임오교변’은 일제가 1942년 11월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검거해 이 가운데 10명이 순국한 사건이다.
강석기 지사의 6촌 당질인 강일 지사는 1930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의거 때 부여지구 주동자로 활동했다. 부여 지역 신간회를 이끈 인물이기도 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강성모 지사는 농민구락부에 가입해 야학을 통해 농민과 청소년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쳤다. 1933년 애국 항일 동지들을 규합하는 지하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1년형,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다. 1940년 북간도 연길현으로 이주해 항일운동을 하다가 서거했다.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그의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잊혀진 갈 돕 회에 옛 노래 그립구나.
열여섯 홍안 소년 나팔 불던 옛동산
강물은 예전과 같이 이 산마루를 휘감는다.
백마강 강조개 섬 아홉 동지 그 맹세는 뉘라서 헤아리랴.
용솟음친 그 나날들
오로지 조국광복을 내가 먼저 이룩하리.
님 그리사 일편단심 한도 많은 한 평생
겨레 위한 스물 여섯 남긴 것은 어린 남매
님의 뜻 영원하리니 고이고이 잠드소서.’


강일구·강병국 지사도 야학을 통해 농민계몽운동을 하며 항일 활동을 했다. 강병국 지사는 강일 지사가 꾸린 신간회 조직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18명이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공주형무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 69세에 서거했다.
강석기 집터. 21c 부여신문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을 제외한다면 장정마을에서 이들 애국지사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비석도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아 제 각각이었다. 강석기 지사가 살던 집터는 산기슭에 있는데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포크레인만이 분주하게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 땅은 강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팔아 지금은 아무 연고가 없다. 하다못해 집터에 표지석 하나라도 있으면, 마을 공터에 이 마을이 이들 애국지사를 배출한 마을이라는 것을 알리는 작은 안내판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정마을 전경. 21c 부여신문

나라를 빼앗기고 삶이 도탄에 빠져 있던 그 시절, 일신이 안위를 넘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한 몸을 바쳤던 애국열사들. 부여에 ‘장정마을’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은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고, 우리는 그들의 삶과 정신을 지금이라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하늘에서라도 선열들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는가.


대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

교조(敎祖) 나철(羅喆:1863년∼1916년)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례에 걸쳐 일본에 건너갔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 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09년에 동지 오기호(吳基鎬) 등 10명과 함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齋洞)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했다.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교도수는 2만여 명으로 늘었고,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같은 해 만주 북간도(北間島)에 지사(支司)를 설치했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本司)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했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 해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본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단군사당. 21c 부여신문


제2세 교주 김헌(金獻)이 취임했는데, 그는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고,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했다.
그 실례로 19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1948년 김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領) ·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施敎堂)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됐고, 1932년 이른 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됐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했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총본사가 부활되고 교세회복을 위해 대종교중흥회가 조직되어 『역해종경 4부합편』 등의 경전이 간행됐으며, 1958년 4월 재단법인 대종교 유지재단(維持財團) 설립이 인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대종교 [大倧敎 ] | 네이버 백과사전

이 프로그램(기획 기사)은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취재)한 것입니다.


필자 / 소종섭 21c 부여신문

필자 소종섭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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