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아침] 아버지의 산
[목요아침] 아버지의 산
  • 이광복
  • 승인 2013.12.1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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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충청남도 부여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내게는 아버지 어머니가 각각 두 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주 어렸을 때 젖 떨어지자마자 큰아버지 슬하에 양자로 들어간 탓이었다. 나는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큰아버지를 ‘아부지’로, 큰어머니를 ‘엄니’로 부르며 성장했다.

양가와 생가가 한 마을에 있었다. 양가에서 자란 나는 수시로 생가를 출입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양가와 생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우리 집’이니까 자연스럽게 드나들 따름이었다. 생가에도 ‘아부지’, ‘엄니’가 계셨다. 그뿐 아니라 생가에는 큰누님과 동생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먹고 자고 놀 수 있는 집이 두 군데나 있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양가와 생가가 모두 빈한했다. 양가는 송곳 꽂을 땅조차 갖지 못한 극빈 수준이었고, 생가는 논 몇 마지기와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빈농이었다. 식구는 많고, 농토는 적고……. 생가 역시 가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양가의 아버지는 반농반학(半農半學)의 어중간한 지식인이었다. 농민이면서 농민이 아니었고, 학자이면서 학자가 아니었다. 농민이라고 말하기에는 경작할 농토가 전무했고, 학자라고 말하기에는 사실상 책가방 끈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문맹자 일색이었던 그때 그 시절, 어느 정도 한학을 배우고 비록 중퇴했을망정 일제 강점기의 소학교 공부를 통해 다소나마 ‘글’을 깨우쳤다는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견문이 넓었다. 일찍이 일본에 징용도 갔다 오셨고, 젊은 시절부터 여기저기 타관 객지를 드나들었던 터라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뭔가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한 잔 술로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의 손재주는 비상했다. 예컨대 청올치로 노끈을 꼬거나, 왕골로 자리를 매거나, 볏짚으로 삼태기며 메꾸리를 만들거나, 짚신에다 멍석을 삼을라치면 모두가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솜씨가 뛰어났다. 아버지께서는 대장간에서 손수 쇠를 두들겨 칼이며 낫이며 괭이를 만들기도 했다.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손재주에 관한 한 명인(名人)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 저녁거리 간 데 없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의 경우가 꼭 그러했다. 여러 가지 재주가 비상했지만 한 평생 끼니거리 걱정 면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배웠더라면 차라리 머슴이든 소작이든 아예 땅 파먹는 농사꾼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애당초 농사일에 서툴렀다. 그렇다고 펜대만으로 살기에는 학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아버지는 농민도 아니었고, 노동자도 아니었으며, 그 어디 사무직으로 일할 수 있는 이른바 화이트칼라도 아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가난과 고생은 일찌감치 준비돼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아버지는 그런 어정쩡한 처지에서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런 아버지께서는 봄가을 사방공사 감독으로 일하셨다. 그것이 소득을 만드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아버지는 관내 사방사업소에서 유능한 감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사방공사가 연중무휴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생가의 아버지께서는 동네의 다른 농민들과 더불어 품앗이로 농사를 지었다. 본격적인 농번기 안팎의 봄가을에는 당신의 형님과 함께 사방공사에 나가 거기에서 얻어지는 노임으로 생계를 보탰다.

양가의 아버지가 일종의 관리직이었던 반면, 생가의 아버지께서는 몸소 석축(石築)을 하셨다. 산사태가 났거나 날 위험이 있는 곳에 돌 쌓는 일. 해머와 망치로 돌을 깨고 다듬어 쌓아 올리는 아버지의 정교한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버지의 노동은 힘들었다. 날마다 무거운 돌을 다루어야 했던 아버지는 특수한 기술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다른 인부들보다 일당을 조금 더 받았다.

필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가서 몇 번인가 인근 사방공사 현장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풀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헐벗은 곳에 떼를 입히고, 화학비료를 주고, 지게로 돌을 져 나르고, 사태가 날 만한 곳에 석축을 하고……. 사방공사 현장은 언제나 근동 아저씨 아주머니들로 북적북적 활기에 넘쳤다. 어린 나는 두 아버지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런 사방공사 현장을 체험했다.

그 당시 눈에 보이는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이었다. 벌겋게, 또는 허옇게 속살을 드러낸 산. 땔감이라곤 오로지 나무밖에 없었던 그때 그 시절, 농촌 사람들은 누구나 사시사철 땔나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끼니마다 밥을 짓고,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 아랫목 윗목 방을 따뜻이 덥히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아궁이로 밀어 넣고 불을 때야 했다.

콩깍지 수숫대 참깨 들깨 깻대궁에다 볏짚에서 왕겨에 이르기까지 농작물에서도 일부 땔감이 나왔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땔감은 산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통나무를 쩍쩍 쪼개서 말린 장작은 아주 고급 땔감이었고, 고주배기, 나무뿌리, 삭정이, 솔가리, 솔방울, 가랑잎 등 안 때는 것이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산에서 나무가 제대로 자랄 겨를이 없었다. 한 겨울에는 청솔가지를 분질러다 땠고, 한 여름에는 푸나무를 해다가 말려서 아궁이에 우겨 넣곤 하였다. 그러니까 한쪽에서 사방공사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 나무뿌리까지 마구 캐다 때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다.

도끼와 톱으로 멀쩡한 생나무를 찍어 넘기고, 낫으로 나뭇가지를 치고, 괭이로 나무 등걸을 캐고, 갈퀴로 솔가리와 가랑잎을 긁고……. 땔나무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 농촌사람 치고 나무꾼 아닌 사람이 없었다. 논두렁 밭두렁 가시덤불과 잔디까지 뿌리가 드러날만큼 낫으로 몽글게 후벼 파서 갈퀴로 박박 긁어모으던 눈물겨운 시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네에는 시루봉이 있다. 시루봉은 마치 시루를 엎어 놓은 듯 동글 납작한 작은 야산으로, 바로 우리 마을의 상징이다. 동네 이름이 이 시루봉에서 이름을 따온 ‘시루메(시루뫼)’이니까. 어원을 따져볼 필요도 없이 시루봉이 시루메고, 시루메가 곧 시루봉 아닌가. 행정구역을 획정할 때, 인근 몇몇 마을을 함께 묶어 증산리(甑山里)로 명명했다. 증(甑)은 ‘시루 증’이요, 산(山)은 ‘뫼 산’이니, 시루봉은 증산리의 원천이며 우리 마을 시루메는 곧 증산리의 모태인 것이다.

양가의 부모님은 일찍이 이 시루봉 산주(山主)의 특별한 호의로 산 끝자락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비록 초가삼간이었지만, 산주는 고맙게도 그만한 집터를 선뜻 내준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지주에게 물어야 할 도조 대신 시루봉을 관리해 주었고, 그 집 논밭에 나가 한 해에 나흘씩 노동을 해주었다.

말하자면 곡물이나 현금으로 납부해야 할 대지 임차료를 날품으로 대체한 셈이었다. 작은 누님과 필자는 바로 그 양가 오두막에서 자라났고, 필자의 경우 양가의 부모님 대신 산주 집에 가서 늦모를 심거나 콩밭을 매주기도 하였다. 여남은 살 때, 필자는 산주의 땅인 우리 집 굴뚝모퉁이 언덕에 은행나무 묘목 한 그루를 심었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시루봉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산지기는 아니었지만, 시루봉 끝자락에 집을 짓고 사는 한 시루봉을 관리하는 것은 우리 집의 책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수시로 이 산을 한 바퀴 둘러보며 나무꾼을 단속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산 둘러보는 것을 ‘산 말리러 간다’고 말했다. 산을 말리다니? 그건 나무꾼으로 하여금 나무를 하지 못하도록 말린다는, 이를테면 싸움꾼의 싸움을 말리는 것과 유사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렇듯 산을 잘 말림으로써 시루봉에는 여간해서 나무꾼이 붙지 못했고, 언제나 소나무와 참나무와 잡목들이 시커멓게 우거져 있었다. 여름에는 백로가 날아와 산을 하얗게 뒤덮고는 와글와글 우짖으며 또 다른 장관을 연출했다.

우리 집은 언제나 이 산에서 땔감을 자급자족했다. 우리 동네 다른 주민들이 먼 산으로 땔나무를 하러 다닌 반면, 우리 가족은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시루봉에 가서 갈퀴로 슬슬 솔가리만 긁어 와도 거뜬히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우리 집의 경우 비록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지만, 시루봉이 있음으로 해서 땔감만은 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필자는 종종 지게를 지고 시루봉에 들어가 나무를 해다가 부엌 나뭇간에 부리곤 했다. 시루봉은 역시 고마운 산이었다. 그런데 웬걸 산주가 시루봉의 일부를 계단식으로 개간하면서 이 산은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우리 식구들이 애지중지 지켰던 나무들을 일제히 벌목할 때의 그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쯤 해서는 해마다 떼 지어 날아오던 백로도 발길을 딱 끊었다.

그 후 필자는 객지로 나왔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 필자는 단 하루도 시루봉을 잊은 적이 없었다. 시루봉은 우리 동네의 상징인 데다 바로 내가 자란 집터이니까. 달리 말하자면 시루봉이야말로 내 고향 그 자체이니까. 필자는 고향에 들를 때마다 가장 먼저 시루봉으로 눈길을 던지곤 했다. 시루봉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적잖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양가와 생가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혈기 왕성했던 필자 또한 어느덧 이순(耳順)의 문턱을 훌쩍 넘어섰다. 시루봉 끝자락에 있던 우리 오두막집은 수십 년 전에 헐렸다. 다만, 어린 시절 굴뚝모퉁이에 심었던 은행나무만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아 내가 자라난 집터였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생가의 옛 터전도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우리 부모님에게 선뜻 집터를 내주었던,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개간했던 산주 일가도 하마 오래 전 시루봉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외지로 떠나가 소식조차 없다. 필자는 얼마 전에도 고향에 들러 시루봉부터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루봉은 그 자리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었고, 은행나무도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필자는 눈길을 돌려 굽이굽이 이어진 인근의 야산 줄기를 바라보았다. 지난날 벌겋게, 혹은 허옇게 속살을 드러냈던 그 민둥산들은 울창한 숲이 검게 우거져 있었다. 그 산은 양가와 생가의 두 아버지께서 살아생전 땀 흘려 사방공사를 하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두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산자락에 고이 잠드셨다.

ㄹ 21c부여신문

불초 이 광 복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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