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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상진(尙震) 열한번째
[탐사기획] 상진(尙震) 열한번째
  • 21c부여신문
  • 승인 2012.01.1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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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열한번째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장암면 정암리 맞바위 마을 입구에 있는 감군은곡 시비. 21c부여신문

장암면 합곡1리 71번지 유기목 씨의 집 뒤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지난 7일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응달이어선지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었다. 미끄러운 철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가 밭을 지나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는 산 밑 비석으로 갔다. 비석 앞면에는 ‘成安公 尙震先生 遺墟碑’라는 글자가, 뒷면에는 ‘이곳은 朝鮮 中期 大臣인 尙震先生 遺墟址다. ~’라는 비석을 세운 이유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1980년 당시 부여군수였던 이근영 씨가 이 비를 세웠다. 바로 이곳이 조선 중종·명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정승 상진(尙震) 선생(이하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 마을 이름인 합하(閤下~閣下)골은 이 마을에서 정승이 탄생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부여군에서 30년 전에 선생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깨닫고 비를 세웠음에도 이 비를 찾기 위해서는 한참을 헤매야 했다. 물어 물어 겨우 선생의 유허지를 찾았다.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안내판 하나 없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비의 존재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인물은 변함없으되 세월의 흐름은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서 위인의 자취를 망각시켰다.
장암면 합곡리 합하골 생가터에 세워진 유허비(좌). 은산 내지리에 있는 목천 상씨 선산 제각에 모셔져 있는 선생의 영정(우). 21c부여신문

그러나 세월의 흐름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위인들을 발굴하고 그분들의 삶과 정신을 배우려는 우리들의 의식과 노력이 희미하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노력을 할 때만이 그분들은 역사 속에서 지금의 현실 속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찾는 이 없고 돌보는 이 없으면 어느 순간엔가 역사의 현장은 한 줌의 흙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선생의 유허지에서 앞쪽에 드넓게 펼쳐진 딴펄을 바라보며 시공을 넘어 전해오는 선생의 목소리를 듣는 착각에 빠졌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 15-5번지 상문고등학교. 교내에는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선생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비문은 선조 때 홍문관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른 홍섬이 지었다. 글씨는 중종의 부마이며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비문을 쓴 송인의 솜씨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명종 21년(1566)에 건립되었다. 신도비명에는 선생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재상 가운데 공명을 세우고 일생을 마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없지는 않으나 여러 대의 조정을 거쳐 섬기면서 신상에 재앙을 당함이 없이 덕을 지니고 장수하여 세상을 마치도록 임금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오직 성안공(成安公) 한 사람일 뿐이다. 공의 본관은 목천이다. (부친이)성주산에 기도한 뒤 계축년 성종 24년 서기 1493년 6월 초 5일 공이 태어났다. 증조부가 임천(합곡리)에 살 당시에 가세가 유족하여 인근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곤 하였는데 일찍이 그 채권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말하기를 “나의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음덕을 입고 적선을 하면서 공에 이르렀는데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기이하였다. 5세에 어머님을 여의고 8세에 아버지마저 사별하여 서울에 출가한 큰 누님에게 인도되어 소년 시절을 서울 장흥동 누님 집에서 자랐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고 침착하여 벌써 성인 같이 처신하여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상진 선생의 묘(좌)와 신도비(중) 그리고 안내문(우). 21c부여신문

선생은 조선 성종 24년인 서기 1493년 6월 5일에 합곡리에서 부친 의정공과 모친 증 정경부인 연안 김씨 사이에서 출생(이 해에 부여 무량사에서는 매월당 김시습이 세상을 떠났다)하여 명종 19년인 서기 1564년 7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자는 기부(起夫)이고 호는 범허정 또는 향일당이다. 선생은 1516년 24세에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71세에 사임하기까지 무려 48년간 관직에 있었다. 그 중에서 57세에 우의정, 59세에 좌의정, 66세에 영의정에 올라 3정승에 15년간, 특히, 영의정에 5년간 재임하면서 오로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정승 황희·허조와 함께 조선의 3대 명정승으로 꼽히는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다.

선생이 합곡리에 산 것은 8살 때까지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부친(尙甫)은 선생을 사랑함이 더욱 지극하여 학문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며 선생이 7살 되던 무렵 산사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였다. 부친이 가르치는 법도가 극히 엄하여 새해를 맞는 신정에도 집안 출입을 허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8세 때 부친이 별세하면서 선생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서인지 선생은 나이 15세가 되도록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활 쏘고 말달리는 놀이에만 마음을 두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로부터 글을 모른다고 욕보임을 당한 뒤부터 학문에 정진하기 시작해 나이 24세 되던 1516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른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다고 할 수는 없으나 선생의 이력을 살펴보면 지금 보아도 실로 화려한 관직 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치지 않은 관직이 없다. 물론 중간에 모함에 걸려 탄핵을 받거나 좌천된 경우도 있기는 했다.

선생의 이력을 대충 살펴보자. 42세 때 강원도 관찰사, 46세 때 경기도 관찰사, 47세 때 형조판서·평안도 관찰사, 49세 때 한성부판윤, 51세 때 공조판서·병조판서, 53세 때 경상도 관찰사, 54세 때 이조판서, 54세 때 병조판서, 57세 때 이조판서·우의정, 59세 때 좌의정, 66세 때 영의정 등이다. 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은 두 번씩 했고 관찰사를 두루 거쳤다. 좌의정·우의정·영의정 등 3정승을 지냈다. 우유부단했다는 학자들의 평도 있으나 선생은 실로 행정의 달인이었고, 정치권의 부침 속에서도 능력을 인정 받아 나라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계속 갖게 된 관운도 무척 좋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이 관직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탁월한 인품과 청백리로서의 생활 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선생의 ‘自警銘’이다. “경솔한 자는 마땅히 중후함으로 바로 잡고, 급하게 서두는 자는 너그러움으로써 바로 잡고, 초조한 자는 안정을 취함으로 바로 잡고, 포악한 자는 화평한 언행으로 인도하고, 조폭한 자에게는 섬세함으로 교정해야 한다”라는 글이다.

선생은 평소 이 글을 창문과 벽에 붙여 놓고 잘못을 바로 잡는 경계로 삼았다. 항상 안색이 화평하고 움직이고 정지함이 없이 적중해서 비록 다급한 경우에도 빠르고, 높은 말과 조급한 빛이 없으며, 기쁘고 성냄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비복의 어리석은 자라도 한 가지 작은 선행이 있으면 반드시 자제들에게 일러 말하되 “아무개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가히 착한 일이다. 너희들은 작게 보지 말라”라고 말하곤 하였다. 착한 일을 하는 바가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네가 나를 가르쳤도다” 하고 잘못이 있으면 달래고 가르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은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데 있어서 반드시 두 세번 상세하게 반복하여 설명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없이한 후에야 일을 맡겼다. 만일, 선생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런 말을 하게 된 원인을 생각하여 과오를 자신에게 돌리고 “내가 과연 잘못함이 있도다. 백성은 과연 어리석고도 신통하구나”하고 말하였다. 물건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작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답례하는 물건을 베풀었다. 조금 많은 물건을 선물한 사람에게는 “내가 재상이 되었으니 목숨을 연명할 만큼은 얻어먹고 살지 못하겠느냐? 가져온 물건의 1/10만 남기고 갖고 돌아가라. 성의는 이미 받았노라”라고 돌려보냈다.

평생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에 야박하여 조석으로 공양하는 찬이 두어 가지에 불과하여 한 가지라도 더 밥상에 오르면 한 그릇은 상 아래에 내려 놓고 이르되 “옛날에 어진 재상은 음식에 고기를 거듭하지 않았거든 하물며 내가 어찌 그러하지 않으랴”라고 꾸짖곤 하였다. 예복 이외에는 비단을 사용하지 않았고, 평일 거처함에는 무명으로 지은 몸때 묻은 옷을 입기를 좋아했으며, 새롭고 고운 옷을 즐기지 않았다.

선생은 겸허한 심정으로 정승 지위에 오래도록 있고 싶지 않아 질병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대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이 영의정에 오래 있었던 정창손을 “그만 해먹어라”라고 조롱했던 일화를 거론하며 사직을 간청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선생은 스스로 조소하면서 자제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의 정승사업은 참으로 가소롭구나. 영의정 10년 동안 오직 물러나길 구한 한 가지 일뿐 벼슬 살이에서 거론할 만한 치적이 없다. 다만, 남을 해치지 않고 시기하지 않은 두 가지가 조금 남보다 낫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시호가 내릴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행적을 기술하되 공은 노후에 거문고를 좋아하여 술이 좀 취하면 감군은곡(感君恩曲) 한 곡을 타며 스스로 즐겼다 하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서거함에 지위가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가 탄식하고 애석해 함이 하늘을 울렸다. 전에 일하던 관리와 노비들까지 달려가 슬피울었다. 선생은 임종시에 스스로 명(銘)을 쓰기를 “초야에서 일어나 세 번 상부에 들어갔고, 만년에 거문고를 배워 항상 감군은(感君恩) 한 곡만을 탔으며, 나이 73세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라고 했다. 감군은은 그의 자작곡이었다. 4장까지 이루어진 감군은 1장은 다음과 같다.

‘사해 바다의 깊이는 닻줄로 잴 수 있겠지만
임금님의 은덕은 어느 줄로 잴 수 있겠습니까?
끝없는 복을 누리시며 만수무강하십시오.
끝없는 복을 누리시며 만수무강하십시오.
밝은 달빛 아래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며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님의 은혜이시도다.’

장암면 정암리 맞바위 마을에 있는 월파정터(좌)와 그 아래 요월대(우) 터. 21c부여신문

부여에는 합곡리 합하골 생가터에 있는 유허비 외에도 상진 선생과 관련된 흔적이 몇 가지 남아 있다. 합하골에서 2km 쯤 떨어진 장암면 정암리 맞바위 마을에는 월파정과 요월대 터가 있다. 월파정 터에는 민가가 들어섰는데 지금은 허물어 흔적만 남아 있고, 그 오른쪽 밑 백마강 밑에는 요월대 터로 알려진 바위가 있다. 여가 때 선생은 고향에 내려와 월파정과 요월대에서 거문고를 타고 낚시를 하며 후학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정암부락으로 정해진 이유는 선생의 정자가 강변 바위 위에 세워진 이후로 그렇게 불린 것으로 알려졌다.

맞바위 마을에서 태어난 이만용 전 재경부여군민회장은 “어릴 적 월파정 터에서 느티나무 사이로 백마강에 비친 달을 바라보면 실로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라고 회고했다. 뜻 있는 이들의 마음을 모아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추진위원장을 맡아 맞바위 마을에 선생의 감군은곡 시비를 세운 임병고 전 부여문화원장은 “원래는 요월대와 월파정 터에 비석을 세우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마을 입구에 비를 세웠다.

지금은 토사가 쌓여 많이 잠겨 있지만 요월대는 당시에는 강변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선생의 후손들은 해마다 10월이면 은산 내지리에 있는 선산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이곳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ss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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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길현 2023-01-10 07:09:35
흘러간 세월을 한하노니, 옛선인의 발자취 향기롭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