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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아침] 계백(階佰)의 전사와 팥죽거리 전설
[목요아침] 계백(階佰)의 전사와 팥죽거리 전설
  • 이존길
  • 승인 2014.01.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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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성면 현내리 당산성 밑에 마을이 탑골 탑동 새터로 불리우며 마을 앞 도로변에 방앗간이 있다고 하여 그곳을 예부터 ‘팥죽거리’ 혹은 ‘방앗거리’라고 불렀다. 30여년 전만 해도 당산성 밑에까지 나무가 우거진 산기슭이었는데 근간에 이르러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이곳 방앗거리로부터 석성 포사 강을 건너 반조원 세도면 중앙지대를 거쳐 강변 다근리 나루터까지 땅흙색이 진한 팥죽색으로 깔려 있다. 이곳은 팥죽색의 땅이 깔려 있어 ‘팥죽거리’라고 옛부터 불러오고 있으며 비가 내리게 되면 땅흙이 팥죽이 되어 우와틀을 신어야 다닐 수 있고 의복에 묻으면 물이 드는 참 진흙이다.

백제가 망할 때 계백장군은 나라가 기울어져감을 알고 가족 모두를 사별했다. 이후 5천 결사대를 거느리고 논산 황산들에 나가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사와 싸울 시기에 이곳 당산성 밑에는 한 채의 오두막집이 있었다.

이 오두막집에는 병을 앓고 있는 홀아버지와 효성이 지극한 외동딸 처녀가 있었다. 효녀는 매일 마을에 다니며 베옷감을 짜주고 쌀 한 되씩을 얻어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웃마을에 내려가 종일 베틀을 짜고 저녁에 집에 가려고 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부엌에 잠깐 들어오라고 불러 들어가보니 마침 그날이 동짓달 동짓날이라고 팥죽을 쑤어 한그릇을 먹고 가라고 퍼주었다.

그런데 그 효녀는 먹지 않고 훌쩍 훌쩍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눈치 빠른 주인 아주머니는 아버지에게도 갖다 드리라고 한그릇을 더 퍼주었다. 그러자 효녀는 한그릇을 다 먹고 한그릇을 얻어가지고 집에 돌아가던 중 그만 어두운 산 길에서 돌뿌리에 발을 채여 넘어지고 말았다. 정성드려 가지고 가던 팥죽그릇이 박살이 난 것이다. 그 효녀는 박살이 난 팥죽그릇 조각을 들고 울어댔다. 목이 메도록 통곡하며 집에 돌아가 병석에 계신 아버지를 붙들고 또 울었다.

그 다음날 아침 효녀는 어젯밤에 넘어진 곳을 아쉬운 마음으로 가 보았다. 효녀는 깜짝 놀랐다. 한그릇의 팥죽이 남쪽으로 흘러가 흙빛이 팥죽색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고 효녀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하며 세상에 변이 생길 징조라고들 하였다.

마침 계백장군은 황산들에서 신라군과 싸워 승전보를 네 번이나 울리고 있었다. 그때 세도지역 아낙네들이 백제군사들을 위문하려 팥죽을 쑤어 동이에 이고 가려고 할 때 계백장군이 전사를 하였다는 비보를 들었다. 부녀자들은 팥죽 동이를 땅에 놓고 대성통곡을 하며 전사한 군사들의 원혼이라도 먹으라고 사방으로 팥죽을 뿌렸다.

그때부터 석성의 팥죽거리와 세도간의 땅흙빛이 팥죽으로 변하였고, 마을에 초상이 나면 이웃끼리 팥죽을 쑤어다 주는 관례가 생겼으며, 동짓날 팥죽을 쑤어 집 주변이나 벽에 뿌리고 액운을 막는다는 백제의 고유풍습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늙으면 팥죽 냄새가 난다고 하는 말도 이때부터 유래된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 또한 사비도성을 치려고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거닐고 금강 하류 뱃길을 타고 쳐들어오는 그 모습을 보고 세도 반조원 강변의 주민들이 통곡하던 한맺힌 사연의 전설이 아닌가 한다.

ㄴ 21c부여신문

이 존 길
부여군재향경우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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