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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아침] 부여의 새로운 100년을 황금시대로 만들자!
[목요아침] 부여의 새로운 100년을 황금시대로 만들자!
  • 소종섭
  • 승인 2014.01.23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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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군(開郡) 100년’은 잘못된 용어, 과거 돌아보고 부여의 미래를 설계할 시점
부여의 제1 경쟁력은 문화에 있다, 소프트웨어 강화해 브랜드 가치 키워야…


연초부터 올해가 청마(靑馬)의 해라고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한다. 각종 모임 신년교례회는 물론이고 저녁 술자리의 건배사에서도 ‘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힘차게 뛰는 말처럼 올해가 정말 역동적이면서 또한 앞으로 전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절로 와 닿는 요즘이다. 그만큼 우리네 현실이 팍팍하다는 것, 그리고 답답한 세상사를 뚫어줄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갈망하는 흐름이 커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마치 고대인들이 말을 하늘의 전령사로 여기고 신성시했던 것과 닮았다. 고대인들은 뿔을 가진 사슴, 하늘 높이 솟은 나무,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말 등을 하늘의 뜻을 전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했다. 말의 해에 사람들은 신탁(神託)을 구하고자 하는 것일까.

굳이 ‘靑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2014년은 부여군에 있어 특별한 해이다. 지금 같은 부여군의 모습을 갖춘 지 10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100’은 예로부터 완성, 성숙을 뜻했다. 부부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상징을 흔히 ‘백년해로(百年偕老)’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이야 100년을 산다는 것이 꿈만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그러했기에 100세를 산다는 것은 ‘완전한 인간’ ‘궁극의 경지에 이른 인간’을 상징했다. 하물며 부부가 함께 100년을 산다면 어떻겠는가!

‘100’은 또 전체, 크다, 많다는 뜻으로도 통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백제라는 말의 어원인 ‘백가제해(百家濟海)’이다. 여기서 ‘百家’는 ‘많은 사람들’을 뜻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세운 나라’가 백제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흔히 올해를 ‘개군(開郡) 100년’이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용어이다. ‘개군(開郡) 100년’이라는 말은 자칫하면 마치 ‘부여’가 100년 전에 생긴 것처럼 오해를 하게 할 수 있다. ‘부여’는 100년 전에도 있었다.

‘부여(扶餘)’가 지명이 된 것은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 때(742~764)부터였다. 대략 750년대라고 추측된다. ‘부여(扶餘)’라는 이름의 나이가 13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이런 면에서도 부여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물론 당시의 부여는 지금의 부여읍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지역이 작았다. 부여 주변에는 임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림군, 홍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산현, 석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석산현이 있었다. 부여와 임천을 중심으로 해서 홍산과 석성이 주변에 위치한 모양새였다.

대체로 조선시대까지 이런 형태가 유지 된다. 내용적으로 보면 백제가 멸망한 이래 부여는 행정적으로 중심적 위치에 서지 못한다. 패망했지만 왕도였던 곳에 대한 견제 때문이었을까?

부여는 고려 현종 9년(1018)부터 명종 1년(1171)까지 공주의 속군이 된다. 1172년에야 지방관이 파견됐으나 직급이 가장 낮은 감무관에 그쳤다. 석성, 홍산도 사정이 비슷했다. 반면 임천 지역은 고려시대에도 행정적인 중심 위치를 유지했다. 대조사 미륵불과 고려 개국공신인 유금필 사당이 상징적이다.

그렇다면 부여는 어떻게 100년 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일까. 일제강점기인 1913년 12월 일제는 조선총독부령 111호를 발표한 뒤 1914년 전국의 군과 면을 대대적으로 줄였다. 이에 따라 317개 전국 군현은 220개 군으로 바뀌었다. 부여의 경우 부여군(10개면), 홍산군(9개면), 임천군(21개면), 석성군(10개면)이 부여군(16개면)으로 통합됐다. 50개면이 16개면으로 줄어들었다.

이때의 형태가 지금까지도 대체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개군(開郡) 100년’이라고 부르며 크게 기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1914년 개편을 통해 전국의 많은 군들이 부여와 같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여가 현재와 같은 행정 구역이 된 지 100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우리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부여의 지난 100년은 그리 영광된 나날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같은 역사의 불행도 있었지만 부여는 침체되고 낙후된 곳이었다. 이제 다가오는 100년을 부여의 황금시대로 만들어가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백제의 왕도로 상징되는 부여의 제1 경쟁력은 문화에 있다.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해 현재와 만나는 지점을 찾아 융성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도로를 건설하는 식의 하드웨어적인 방향보다는 컨텐츠와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키워 부여의 브랜드 가치를 더욱 높여야 한다. 이런 방향은 결코 농업 발전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여 농업 생산물의 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부여의 새로운 100년을 가슴 설레게 맞는다.

ㄴ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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