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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21c부여신문
  • 승인 2012.01.1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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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능산리고분 (陵山里古墳) : 사적 제15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 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능산리고분 21c부여신문

사비시대의 백제 수도인 부여지역에는 백제인의 삶과 모습을 알 수 있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유적 중 역사의 흐름과 그 당시의 문화적인 변화과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무덤’이다.

부여읍에서 논산 가는 길 약 3㎞ 정도 가면 사비도성의 나성 밖에 있는 나지막한 산과 마주치게 된다. 이 산의 남쪽 경사면에 앞뒤의 2줄로 3기씩 6기의 고분과 북쪽의 1기 등 모두 7기의 고분이 잘 정비되어 있는 고분군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옛부터 ‘능뫼골’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공주구읍지 (公州舊邑誌)에 의하면 ‘관아동십리허유왕릉(官衙東十里許有王陵)’ ‘부여 관아에서 동으로 10리에 왕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능산리고분을 ‘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능산리고분은 왕릉 또는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993년에 나성과 능산리고분 사이의 능산리사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발견됐고, 1995년에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돼 더욱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능산리고분은 신라의 왕릉보다 규모가 작고 소박하게 꾸며져 있으며, 경주의 ‘대릉원(大陵苑)’ 과 비교해 최근에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긴 후부터는 ‘백제 왕릉원(王陵苑)’이라고 부른다.

능산리고분은 일제 강점기에 발굴조사 되었다. 고분의 구조는 외형을 원형의 봉토로 쌓았으며, 내부구조는 모두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의 널방〔玄室〕과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羨道〕이 달린 굴식돌방무덤으로 전형적인 백제 돌방무덤이다.
호랑이 그림벽화 21c부여신문

특히, 1호분(동하총(東下塚)이라고 부르기도 함)은 내부에 사신도(四神圖) 벽화가 그려져 있어 유명하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남벽에는 주작, 북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으며, 천장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백제 무덤 중 벽화가 그려져 있는 무덤은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 1호분(동하총)이 있다. 고분에 사신도가 그려진 것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도교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능산리고분은 이미 도굴을 당해 출토유물은 거의 없으나, 금동제 장신구, 금실, 금동제 관장식 등 일부 유물만이 수습됐다.
금제장신구 21c부여신문

※ 널방〔玄室〕 : 무덤 속에 주검이 안치되어 있는 방
널길〔羨道〕 : 무덤의 입구에서 널방으로 이르는 통로
돌방무덤〔石室墳, 石室墓〕 : 깬돌이나 판석으로 널방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무덤

한 봉 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21c부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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