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로다
[독자기고]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로다
  • 박철신
  • 승인 2014.02.13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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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이란 ‘내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어떤 아픔, 상실, 분노, 좌절, 슬픔, 고독, 괴로움과 같은 근심과 걱정이라는 경계(境界)가 발생했을 때 인과연의 연결고리를 되짚어 가다보면 그 근본 원인은 ‘나의 탐욕과 애착’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무리 내 마음이 본래 없음을 해오(이해해서 깨달음)했다 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두려움이 남아 있으니 근심과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기엔 뭔가 2% 부족하다. 왜일까? 무심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무(無)마저도 놓아버려야 무무명진(無無明盡, 어리석음이란 말도 없고 어리석음이 없어졌다는 말조차도 없는 언어의 첨삭이 필요없는 언어도단의 경지)의 완벽한 자유인이 되는 공(空)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니 이쯤되어야 공부를 모두 끝낸 구경(究竟)이라한다.

무(無)와 공(空)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무심(無心)과 무아(無我)의 경지를 뛰어넘어 공(空)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옛 성인이 낸 숙제인 화두를 절대 꿰뚫을 수 없다.

지식으로 깨친 해오(解悟)와 지혜로 통달한 견성(見性)의 경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100년이란 삶은 우리가 이제까지 돌고 돌며 살아온 억겁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 짧은 순간이다. 수많은 세상에서 수많은 모습으로 태어나고 죽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우리는 깨달음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났고 깨달음의 꽃을 피워줄 생로병사 등 고통과 두려움이라는 엄한 스승도 있고 절대 진리로 방편법문을 설하고 있는 자연이라는 큰 스승도 있으니 인간 몸 받았을 때가 얼마나 공부하기 좋은 때인가?

<집으로 가는 길>을 보면서 인(因, 직접적인 원인)과 연(緣, 환경과 같은 간접적인 원인)의 중요성을 알았고, <변호인>을 보면서 선과 악은 본래 한뿌리임을 알았고, <그래비티>를 보면서 인간이 이세상의 주인이 아님을 알았다.

초발심때 간절했던 구도의 마음을 죽는 날까지 변치말아야한다. 물고기는 잠잘때도 눈을 뜨고 있다. 진리를 구하는 자는 항상 목탁(물고기의 형상을 본떠 만듬)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

한해가 또 지나간다. 얼어붙은 산하대지가 다시 움트려고 꿈틀댄다. 이처럼 계속 변해가는 자연의 이치에 맞춰 살면되는 것이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갈 뿐 나뭇가지에 머물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영양분을 섭취하고 배설하며, 그 수와 크기가 커져 나는 더 이상 어린시절의 내가 아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도 마라. 후회의 과거와 걱정스런 미래를 놓아버리고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면 후회스런 과거도 치유되고 미래의 걱정도 사라진다. 이렇게 자연스레 변해 가다보면 자연속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닷속 풍경이 궁금한가? 그럼 저 산을 바라보라. 산하대지, 우주만물과 너와 나는 본래 한 몸뚱이다. 따라서 내가 한때 너였고 너는 한때 나였으니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로다.

자연은 우주만물의 원초적 고향이니 마음은 자연과 합일(合一)되어야한다. 자연의 모습과 자연의 소리가 바로 내 스승인 것이다. 구름이 산을 지나치지만 산은 희노애락이 없고, 물이 이루러 굽이쳐 흘러도 결국 바다로 들어간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본래 한 몸이었으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로다.

생각이 없어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아는 것이 없으니 마음을 쉴 수 있고, 말을 못하니 개구즉착(開口卽錯, 말로서는 세상의 진리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 입을 열면 곧 거짓말일 뿐이다)하지 않게 되니, 그저 자연의 이치대로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는 갓난아이가 우리의 스승일지니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로다.

ㅎ 21c부여신문

박 철 신
충남의사협회 부회장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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