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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의 ‘哀歡’을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 백화점
‘百濟’의 ‘哀歡’을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 백화점
  • 21c부여신문
  • 승인 2012.01.1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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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소산성(扶蘇山城) : 사적 제5호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 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부소산성 전경. 21c부여신문

‘백제’ 또는 ‘부여’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화암’, ‘삼천궁녀’, ‘의자왕’, ‘계백장군 오천 결사대’라고 한다. 그중 낙화암, 삼천궁녀, 의자왕의 기억을 한꺼번에 떠올릴 수 있는 유적이 있다. 바로 부소산성이다.

부소산성(扶蘇山城)은 사비시기의 백제 도성(都城)으로 백마강이 부소산의 북쪽을 감싸고 흐르는 산성(山城)이다. 산성(山城)은 부소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축조됐고, 또다시 산 전체를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 산성(複合式 山城)이다. 그러나 부소산성의 성벽 중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은 포곡식 산성 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泗沘城, 지금의 부여)로 도읍지를 옮긴 백제 성왕(재위 523∼554년) 16년(538년)에 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에서는 중국 남조(南朝)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年號)인 대통(大通)이 새겨진 도장무늬 기와 조각이 출토돼 527∼528년 경에 부소산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 겹겹이 다져 쌓은 판축(版築)기법으로 축조했으며, 외벽 하단부에는 치석한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산성에는 동·서·남·북의 4개소에 각각의 성문(城門) 시설이 남아 있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 철제자물쇠가 발견됐고, 남문지에는 문주로 사용됐던 초석이 나란히 동서로 남아 있다.

부소산성은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많은 유적이 발견됐고, 산성 안에는 백제시대의 절터(寺址), 낙화암(落花巖), 고란사(皐蘭寺), 영일루(迎日樓), 사비루(泗沘樓), 군창터(軍倉址) 등 건물터가 확인됐다.
여러 가지 무기. 21c부여신문

또한 발굴 조사된 유물은 갈고리창, 철창, 철화살촉, 양지창, 철도끼 등의 무구류와 각종 토기류, 와당, 금동장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 조사됐다.

※-백제의 시기는 수도의 위치로 구분하면

①한성백제 (B.C.18년∼A.D.475년)
②웅진백제 (475년∼538년)
③사비백제 (538년∼660년)의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대통(大通) : 중국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연호로 527년∼528년 사이에만 사용됐다.

한 봉 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21c부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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