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의 애벌레들이 땅위로 세상구경을 나오자마자 얼룩말의 발에 밟혀죽고 연두빛 식물들이 땅속에서 꿈틀거리며 싹을 내밀자마자 얼룩말들의 발에 짓밟히고 갓 나온 풀잎은 얼룩말들의 밥이 된다. 얼룩말이 ‘선(善)’인가? 인간의 잣대로 재면 옳고 그름이 있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선과 악은 본래 한뿌리였다.
세상의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집착과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유위(有爲)적인 마음을 진리에 덧붙인다면 그것은 잘 그린 그림 위에 덧칠하는 격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선승인 경허선사(1846년~1912년)의 일화를 소개해 본다.
제자들과 함께 산문(山門) 밖에서 볼일을 보고 들어오던 경허선사는 한 여인을 절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여인과 자신의 방으로 함께 들어간 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제자들은 그저 밥상만 방안으로 들였다. 경허는 그 여인을 자신의 방에서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그러자 절간에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실스님이 여인을 데리고 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제자들은 안절부절 못했고 몽둥이를 들고 ‘저 따위가 조실이야?’라며 쫓아내려는 동네사람들도 있었다. 사흘 후 그 여인은 방을 나섰다. 제자들이 쫓아가 봤더니 몸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한센병(문둥병) 환자였다. 헐벗고 굶주리고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소외되었던 그 여인을 경허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가며 돌봤던 것이다.
피경조심(披經照心·경전을 펴서 내 마음을 보다)이란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성인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있는가 없는가를 맞춰보고 잘못된 점을 스스로 경책하는 것이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행동해도 계율을 벗어나지 않는다.
의심하지 마라!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의 불꽃을 모두 불어서 끈 상태(니르바나, 해탈)인 성인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라!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산소(oxygen)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 같지만 내가 지금 호흡을 하고 있는 것처럼, 궁극적인 진리는 그저 여여(如如)할 뿐 특별히 따로 숨겨져 있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그 진리를 그저 관조하면 훤히 보이는 것인데...
아무리 진리를 말로 설명해 봤자 그것은 방편(Know how)일 뿐이니 진리를 알려면(Know what) 스스로 통찰해야 한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유위법(有爲法)으로 보면 산과 강이 상(相)으로 보이지만 진리의 무위법(無爲法)으로 본질을 들여다 보면 삼라만상의 존재들의 상(相)이 상이 아닌 것(非相)으로 보이게 되니, 즉 그 형상은 잠시 존재할 뿐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은 없음이다.
진리는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 유위적인 상식과 지식을 훌쩍 뛰어넘어야 볼 수 있는 것이다.거울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뒷통수를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세상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라.
![]() 박 철 신 충남의사협회 부회장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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